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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시탐탐 Apr 04. 2020

퇴사자들.


드라마 제작사로 출근한 지 어느덧 2주가 되었다. 첫 주에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긴장해서인지 집에 오면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2주에 접어든 지금은 조금씩 이곳 상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후에 쓰는 글들은 <드라마 관찰일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은 그 시작으로 최근 2주 동안의 핫한 이슈. <퇴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출근한 지 2주 만에 벌써 2명이나 퇴사를 했다. 처음 그만둔 친구는 내부 조연출이었다.

(영화에는 없는) 내부 조연출은 촬영 현장에 나가지 않고, 감독과 편집기사와 함께 최종 영상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내부 조연출을 담당한 그녀는 나와 같은 날 출근했지만, 출근 4일 만에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했다.


그녀가 말한 퇴사 사유는 '서로 맞지 않다!'였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서로 맞지 않을 경우 언젠가는 그만둘 수밖에 없는 법이고, 그만두는 시기가 늦어질수록 남는 사람들에게도, 그 자리를 메꿔야 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녀의 빠른 판단은 오히려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목요일에 퇴사한 그녀가 월요일에 다른 드라마에 출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그녀는 출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드라마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 곳에 출근은 시작했지만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이니 두 편의 드라마를 비교했을 것이고, 결국 본인에게 더 이로운 작품으로 '갈아타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럴 때가 있다. 일이 없어서 일을 못하다가도 막상 출근을 시작하고 나면 이상하게 다른 제안들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작품이 더 좋은 작품 일 때 혹은 그 작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때 등은 사실 마음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마음을, 더 이로운 것을 선택하는 건 나쁜 게 아니다. 나 역시 이런 상황에서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선택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녀의 '거짓말'에는 솔직히 안타까운 마음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 일이 아니더라도 흔히 동종업계라 불리는 일을 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듣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녀의 '갈아타기' 과정처럼 말이다. 이럴 경우 다른 작품을 선택했다는 것보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는 게 더 화가 난다. 그리고 이런 경우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녀에 대해서 좋게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화살을 다시 맞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이 잘 되도록 도와주는 건 어렵지만 안되게 방해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럴 때는 차라리 솔직하게-


"죄송하지만, 다른 작품이 더 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당장은 서운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구하기 힘들어서, 사람을 구하는 동안 그녀의 자리를 메꾸는 누군가는 안 좋은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번째 퇴사자는 보조작가였다.

그녀는 출근한 지 2일째 되던 날, 양치질을 하고 있는 내게 먼저 말을 건네 준 사람이었다.

"처음 뵙는데... 저는 보조작가입니다"

"아, 어제부터 출근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영화의 경우는 대부분 작가 혼자서 글을 쓰기 때문에 '보조작가'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매일 밤을 새우는지 늘 초췌한 모습이었고, 다크 라인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회계인 나는 인건비들을 정리하다가 그녀의 보수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보수의 절반에 가까운 보수를 받고 있었다. 나 역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기 이전에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어쩌면 내 모습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코끝이 찡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색한 인사 이후에, 어색한 눈웃음만을 건넬 뿐 서로 말을 나누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지난 수요일,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만 울리는 조용한 사무실 너머로 갑자기 큰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작가와 보조작가가 작업하고 있는 방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새로 나온 대본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뭔가 작은 오해가 있었나 보다.


고함 소리가 나자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그 방으로 몰려갔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작가는 더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흥분한 작가를 일단 진정시키고, 각자 자리로 돌아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작가가 방에서 나오더니 말했다. "다른 보조작가 구해주세요."


그 말만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린 작가 뒤로 보조작가가 노트북과 짐들을 챙겨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방을 나왔다. 그 모습이 보조작가의 마지막이 모습이 되었다. 상황을 수습하고자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보조작가가 한 실수는 그리 큰 실수가 아니었다.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되는 그런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당장 그만둬!"

크랭크인이 얼마 남지 않았고, 새로운 대본이 나오는 날이라서 작가도 잔뜩 예민해졌을 수도 있다.

"오늘 하던 일부터 먼저 정리할게요"

연이은 밤을 새우느라 보조작가 역시 그만큼 예민했을 수도 있다.

"됐으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져! 지금 당장!!!"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사소한 실수로 지난 5개월을 동거 동락한 보조작가에게 너무 쉽게 '그만두라고' 말하는 작가와 그만두라는 말을 듣고,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고, 사무실을 뛰쳐나가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리해서 보내준 보조작가.  


물론 출근한 지 2주밖에 안된 나는 그 두 사람 사이의 일들을 전부 알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함께한 시간과 노력이 있는데 서로 '이별'을 고할 때 이런 식은 아니지 않나?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건 없겠지만, 영화 일이든 드라마 일이든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인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해서야 어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까!




아르바이트, 회사, 영화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내가 퇴사자가 되기도 하고, 수많은 퇴사자들을 지켜보기도 했다. 아마 '어른'이 되는 과정 속에서 누구라도 한 번쯤, 아니 여러 번 겪는 일일 거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마음 한켠에 '퇴사자'를 꿈꾸면서도 출근을 하고, 오늘 하루를 묵묵히 견디고 있을 거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번에 드라마일을 배우고 나면 이후에는 드라마로 안착을 하든, 영화일을 계속하든 양쪽 시스템을 모두 겪어봤으니 더 좋은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쭙잖은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출근한 지 2일째가 되었을 때 바로 알았다.

'아,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 역시 똥밭이구나!'  


그동안의 경험들로 굳이 더 겪어보지 않아도 이 드라마를 계속했을 때 벌어질 일들과 내 모습이 상상이 됐다.

그래서 매일 아침,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탈 때면 '하루라도 빨리 퇴사자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분명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과정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드라마를 경험해 보기로 한 내 선택'에 나름의 최선을 다해 보기로 마음을 다잡고,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우리는 끝까지 열심히 해서 다음 작품도 같이 하자!"

내부 조연출과 보조작가가 나가고, 다시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서 제작 PD가 말했다.

"저는 이번 달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다음 작품은 다음에 생각할게요"


제작 PD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내 말을 듣고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순수 100%의 진담이다. 지금은 내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테지만 이 드라마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쉬운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간다고 해도 분명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펑펑 터질 거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일은 다 힘들다.

그 과정에서 남을지, 그만둘지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최선이 결국 그만두는 선택일 때에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싫든 좋든 나와 함께 하기를 선택해준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날, 어느 순간! "당장 그만둬!"라는 말을 듣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거다. 그때 그 사람들 역시 뒤돌아 '안녕'이 아니라 적어도 함께 했던 시간과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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