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가 끝날 무렵 창밖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1층으로 내려오니 역시나 비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고, 문 앞에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서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나란히 서서 떨어지는 비를 봤다. 여자아이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을지, 그치기를 기다릴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둘이 쓰기에 내 우산이 작았지만, 여자아이가 비를 맞고 집까지 가기엔 날씨가 제법 추웠다.
"집이 어디세요?"
여자아이가 작은 눈으로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나는 우산을 살짝 들어 보여주며 어색하게 웃었다.
"가까워요"
여자아이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던지고는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고 그대로 빗속으로뛰어 들어갔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여자아이는 낯선 사람의 호의가 부담스러웠겠지만, 나도 용기 내서 물어본 거였는데 도망가듯 뛰쳐나가니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둑 투둑 투두득-거세지는 빗속을 걷다 보니 문득 그 남자가 생각났다.
집이 어디세요?
퇴근하려고 사무실을 나왔더니 사람들 손에 우산이 들려있었다. ‘비가 오려나?’ 하늘을 보니 우중충한 구름이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짙어지는 구름을 보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하늘이 버텨주기를 바라본다. 띡! 교통카드를 찍고 나왔더니 허둥지둥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출구 쪽으로 걸어가니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발이 묶인 사람들로 주욱- 늘어져있었다.
역시나 후두득 후두득- 비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잠시 퍼붓다가 그칠 소나기가 아니었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역 안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우산은 없다. 핸드폰을 꺼내 최근 통화목록을 내려본다. 부를 사람이 없다는 걸 한번 더 확인하고, 가방 안에 핸드폰을 넣는다. 그렇게 품 안 깊숙이 가방을 쑤셔 넣고서야 주욱- 늘어진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온다.
비를 맞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내 옆으로 뛰기 시작했다. 뛰나 안 뛰나 어차피 맞을 비, 나는 뛰지 않고 그냥 사부작사부작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축- 늘어져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 입속으로 들어오는 빗방울들을 툴툴 털어내곤 품 안의 가방을 확인한다. 흠뻑 젖었다. ‘아, 씨. 망할 비’ 그때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우산이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집이 어디세요?"
띠리링~ 횡당보도 신호가 바뀌고 옆에 사람들이 신호를 건넌다.
"비가 너무 많이..."
남자가 무언가 말을 하는데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횡단보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나서야 힐끗뒤를 돌아봤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황당한 표정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까닥- 한번 숙이고는 집을 향해 뛰었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건다는 건.
지금 사는 곳이 홍대 인근이다 보니 낯선 사람이 불쑥- 말을 걸어오는 일이 많다. 처음에는 길을 물어보는데 친절하게 알려주면 그들은 그다음 말을 던진다. 그렇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건다는 건 일명 '도를 아세요?'다. 그들은 학생이기도 하고, 예쁜 아가씨이기도 하고, 엄마 같기도 하고, 외삼촌 같기도 하다. 그들은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있다.
아는 동생 중 한 명은 길을 알려주다 그들에게 붙잡혀 단독주택 같은 곳까지 가게 됐는데 그 안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단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욕조 같은 곳에 억지로 침수? 까지 당하고 나서야 그곳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 일화를 들은 뒤에는 그들이 무서워졌다.
길을 가다가 전방 50m 내에 수상한 사람이 보이거나 불쑥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나도 모르게 바쁜 척 발걸음을 더 빨리 옮긴다. 그러다 보니 정말 길을 몰라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까지 쌩-하고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 '도를 아세요?'이야기는 '나는 어쩌다 낯선 사람의 호의를 그냥 지나치게 됐을까?'를 생각하다가 찾아낸 핑계다. 거리에 모든 사람들이 선의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낯선 사람들은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비 오는 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는데 낯선 남자가 우산을 씌워준다면... 심쿵! 해야겠지만 어찌 된 게 나는 겁부터 덜컥 났다. 가끔 비 오는 날이면 그 남자의 황당한 얼굴이 생각난다. 회사 다닐 때였으니 25살 전이었을 거다. 그 후로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온 적은 많았지만 우산을 씌워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아직도 온몸으로 비를 맞는 사람을 보면 우산을 씌워주고 있을까? 지금 낯선 남자가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내게 우산을 씌워준다면? 39살의 나는 덥석 '감사합니다~' 하고 우산 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이제야 용기 낸 내 호의를 거절한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빗속을 선택한 여자아이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겨우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는 정도의 일이지만...
여자아이도, 지금의 나도 낯선 사람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낯선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려고 마음먹는 일 역시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