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너의 소울푸드는 마라탕이냐
두 아이가 같이 점심으로 마라탕을 사이좋게 사 먹고 오고 싶다고 허락해 달란다.
평소 둘이 뭔가를 같이한다고 하면 형제애가 돈독해진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기쁜 기색을 보였던 나를 정확히 파악한 요구였다. 이러면 엄마가 들어줄 것이라는 계산된 요구.
정말 오랜만에 아이들의 순한 얼굴과 공손한 말투를 보았다.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얘들이 내 자식이 맞나 싶었다. 아이들은 엄마 카드를 요구할 때 매우 상냥해지고 유순한 표정을 하곤 한다. 완벽한 자본주의 미소다.
그래,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거지. '형제끼리 같이', '사이좋게' 먹고 온다잖아.
대략 어느 정도의 예산이 드는지 묻고 엄. 카. 를 넘겼다. 예의 바르게 다녀오겠다고 인사도 잘한다.
조금 있다 보니 카드 결제 문자가 연거푸 뜬다.
"어??"
한 사람당 만원 정도면 먹는다는 마라탕이 얼마야 이게?? 난 다시 영수증을 확인한다.
잠시 후 또 긁힌다. 이번엔 마라탕 골목의 한 카페다. 아하 음료수도 드셨군.
평소 제 용돈이 너무 적어서 그리고 음식 값도 너무 비싸기 때문에 제대로 뭐 하나도 사 먹을 수가 없다고 징징대던 아이들이 밥도 먹고 디저트도 먹고.. 아주 작정하고 풀코스로 즐기는 듯했다. 내 카드로.
제 돈은 아까워 못쓰지만 내 돈은 막 쓴다 이거지.
영수증이 긁힐 때마다 아이들의 동선이 그려지고 얼굴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두 녀석이 얼마나 즐겁게 신이 나서 엄카를 긁고 있는 건지.
자주 티격태격 싸우지만 이럴 때에는 죽이 어찌나 잘 맞는지,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나중에 들어보니 마라탕집에서 고기를 추가 추가 추추가 했단다. 엄카 덕에 실컷 먹었다나 어떻다나.
처음 나갈 때 얘기와 다르다고 인상을 쓰는 내 옆에서 남편이 급하게 거든다.
"잘했어! 허락보다는 용서가 빠른 법이지."
우리 집 아이들의 요즘 최애 음식은 마라탕과 '마라'를 넣은 각종 음식들, 마라샹궈, 마라 떡볶이, 마라탕면 등의 통칭 '마라'시리즈들이다. '마라'의 얼얼함이 사춘기 아이들의 성격과 비슷해서 좋아하는 건지 그냥 자극적 이어서 좋아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우리 집 아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십 대 아이들이 '마라'에 푹 빠진 상태란 사실이다.
일이 년 사이 학원가에 마라탕집이 유행처럼 번지더니 아직도 성황리에 영업 중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나가다 보면 학원가에 오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마라탕 집에 있는 건가 싶을 만큼 십 대 아이들로 꽉 차 있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그중의 하나다. 학기 중에는 한 달에 서너 번 정도 간다면 방학 때는 학원가에 머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가는 듯했다. 학원 시간 사이에 혼자 식사를 해결해야 할 때도 가고, 친구들과 친목 도모를 위해서도 가고, 마라탕이 먹고 싶으니까 가고. 뭐 대충 들어보면 늘 항상 마라탕이 좋다는 얘기다. 아무 일 없어도 주기적으로 혹은 불시에 그냥 마라탕이 당기는 것이다.
* 아이에게 물어본 마라탕이 좋은 이유*
첫째, 빨리 먹을 수 있다. (아이들이 선택해 담으면 재빨리 끓여서 갖다 준다)
둘째, 싫어하는 식재료 특히, 채소 같은 것을 빼고 원하는 것만 먹을 수 있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담을 수 있다. 엄마처럼 골고루 담으라는 둥의 잔소리가 없다)
셋째, 먹고 나면 땀이 확 나면서 시원하고 뭔가 개운해서 기분 좋다. (중년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한다)
넷째, 친구들이 다 거기 있다. (옛날, 동네 미용실에 동네 아줌마들 다 모여있는 것처럼 거기 모인단다)
다섯째, 엄마 아빠는 절대 안 오니까 좋다.
(이건 내 생각. 아이들은 특히 부모에게서 사생활을 엄청 지키려고 용쓴다. 왤까?)
아이들이 하도 '마라'를 입에 달고 살길래, 한 번은 중식당에 갔을 때 작정하고 마라가 들어간 '어향가지 볶음'을 먹어본 적이 있었다. 우와. 입안이 마비되는 것 같은 얼얼함이라니. 맵기는 또 얼마나 맵고. 한두 개 먹었을 뿐인데도 입부터 마비가 와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소화가 잘 안 되고 위가 안 좋은 나 같은 사람들에겐 죽음의 음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내외는 그 후로 '마라'는 냄새도 싫은 음식 중의 하나다.
하지만, 요즘도 아이들에게 '점심 뭐 해줄까?'나 '뭐 먹고 싶어?' 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마라샹궈다.
마라 소스만 하나 구비해 놓으면 집에서 해주기 간편하기도 하고, 내가 안 해주면 어차피 또 마라탕 집으로 갈 것을 알기 때문에 차라리 해 먹이는 게 속편하다.
어차피 먹을 거 차라리 좋은 재료도 된 것을 먹이고 싶기 때문이다.
밖에서 사 먹는 마라탕의 재료들을 보면 푸주나 옥수수면, 납작 당면, 분모자 등등 중국산이 거의 대부분이라 염려가 되기도 하고, 또한 아이들이 주문을 해서 먹을 때 보통 무게로 가격을 책정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마음껏 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는 별도의 요금을 받는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식재료를 고기와 함께 듬뿍 넣어 마라샹궈를 해주되, 로제 마라상궈로 변환한다. 별거 없다. 생크림만 추가하면 되니. 다만 로제로 이름이 변하면서 지옥의 매운맛이 많이 중화된다.
처음 집에서 오리지널 마라샹궈를 해줬을 때, 두 녀석 모두 매워서 "쓰~읍" 소리만 가득했었는데도 맵지 않고 맛있다면서 쌍따봉을 날리곤 했었다. 누가 봐도 허세인걸 딱 알겠는데도 아이들은 매워서 얼굴이 벌게진 채로 물, 우유를 연거푸 마시면서도 한사코 절. 대. 매운 건 아니라고 했다. 매운걸 맵다고 말할 수 없는 허세라니.
눈가가 촉촉한 와중에도 맵부심을 강력하게 부리고 싶다니 그래 인정.
아이들 자력으로는 결코 허세를 내려놓을 수 없으므로 엄마 마음대로 로제로 바꿔 줬더니 '뭐 이것도 괜찮네' 라며 그 후로 집에서는 늘 로제 마라샹궈다.
밖에서는 여전히 그냥 마라를 고집한다. 맵부심은 자존심이라나 어떻다나.
마라탕이 들어오기 전, 우리 집 아이들의 최애는 불닭볶음면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얘도 마라와 그 결을 같이 한다. '지옥의 매운맛'. 그래도 얼얼함은 없어서 마라 친구들 보다는 순한 맛이랄까.
불닭 시리즈도 얼마나 많이 나왔었는지 거의 마라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큰아이는 불닭이라고 쓰여 있는 거면 뭐든지 다 사 먹어보곤 했다. 하다 하다 빵도 불닭 감자빵을 먹었다. 또한 불닭 소스를 구비해 두고 내가 해주는 거의 모든 음식에 불닭소스를 뿌려 먹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의 식탁에서 빠지면 절대 안 되는 식재료가 '불닭'과 그 친구들이었다. 불닭이 없으면 그 소스라도 뿌려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엄마 입장에선 불닭도 질색이었는데 마라까지 아주 질색팔색 할 노릇이다. 아이들이 다른 좋은 음식, 건강한 음식을 먹었으면 좋겠는데 말해봐야 뭐, 뻔하다. 굶을지언정 싫은 음식은 입에 대는 법이 없다.
아이들이 먹으면 속 버릴 것만 같은 조미료 덩어리의 강력한 매운맛을 왜 고통스러워하며 삼켜내는 건지, 왜 이렇게도 불닭에 이어 마라까지 광적으로 집착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불닭볶음면은 한 그릇을 다 먹어내는 것이 승자의 기본 요건이었다면 마라는 총 5단계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자존심을 걸기도 한다고 한다. 그게 뭐라고 자존심이라니. 내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지만 남자아이들의 허세란 게 그들은 참 진지하다. 알 수 없는 중닭(병아리도 닭도 아닌 어중간하고 가장 못생긴 중간단계의 닭. 사춘기 청소년남자아이들을 가리켜 중닭이라고도 한답니다)들의 세계.
아이들이 불닭이나 마라탕을 먹는 것을 보니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허기와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드나들던 학교 주변의 그 분식집들.
분식집 앞에서 늘 끓고 있던 빨간 떡볶이와 고소한 냄새 풀풀 풍기던 바삭한 튀김, 라면을 비롯한 각종 분식류가 생각난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리운 그 맛. 친구들과 그 분식들을 함께 먹으면서 스트레스도 날리고 고민 상담도 하며 친목을 쌓아가곤 했었다. 그 분식들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의 몸의 허기와 마음의 허기를 모두 채워주는 소울 푸드였다.
아이들의 마라와 불닭 친구들도 옛날 우리의 분식류에 해당하는 그런 종류의 음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음식이 아닌 학창 시절의 종합 힐링 코스, 급성장 중인 십 대들의 소울푸드.
다만, 우리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위치다. 우리 때는 학교를 드나드는 길목에 항상 많은 분식집들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동네는 그렇지가 않다.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 학교 주변이 다 공원과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모두들 학원가로 가고, 대부분의 음식점도 학원가에 있다.
내가 지금도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학교와 그 주변의 분식집 풍경을 떠올리는 것처럼
나중에 성인이 된 아이들은 학원가와 학원가 주변을 떠올리고 마라탕집을 기억해 내려나.
참, 마라탕은 중국 음식인데 아이들의 소울푸드가 외제가 되면 어떡하지.
소울푸드가 외제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이래저래 우리 때와는 너무 다른 요즘 아이들.
그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힐링법과 힐링 푸드가 추억에 남게 될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