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와 함께 안경점에 가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다. 해가 쨍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양동이로 들이붓듯 내리는 비를 보고는 서둘러 우산을 챙겼다. 시계를 보니 작은 아이와의 약속 시각이 살짝 아슬아슬 하기는 했지만 조금 뛴다면 큰아이에게 우산을 갖다 주는 것도, 작은 아이와의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는 것도 가능했다.
큰아이에게 무사히 우산을 전달하고 또 언제 비가 내릴지 몰라 우산을 들고 작은 아이를 만나러 갔다.
안경점에 도착했을 때 작은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하니 안경점 앞 벤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더운데 밖에 있어? 안에서 기다리라니까. 엄마 지나가는 것 못 봤어?"
작은 아이는 묵묵 부답이다. 얘야, 내 말이 안 들렸니?
살짝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냥 넘기고 안경점에 들어갔다. 작은 아이는 안경에 관한 질문에도 대답이 없다.
할 수 없이 대충 바뀐 도수 대로 안경을 맞췄고,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안경점에는 작은 카페가 있어서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작은 아이는 혼자서 휑하니 카페로 향했고, 둘러보더니 슬러시 한 컵을 가져와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나에게 이쪽에 앉자거나, 뭐 드실 거냐는 등의 질문은 전혀 없었다.
질문은커녕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슬러시를 먹으며 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맛있냐?"
작은 아이는 듣는 둥 마는 둥 제 핸드폰만 봤다.
"엄마도 캔음료 하나 갖다 줘. 저게 좋겠네. 옥수수수염차. "
작은 아이가 그제야 내 얼굴을 본다. 날 빤히 보는 아이의 눈동자 위로 욕이 지나가는 듯했다.
'알아서 갖다 먹지 왜 나한테 가져오라 마라야.'
"어디요?"
"저기 냉장고 둘째 줄 왼쪽."
끝까지 심부름을 시켜서 음료를 먹었지만 기분이 정말 나빴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만, 작은 아이는 끝까지 말 한마디 없이 핸드폰만 보다가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해가 쨍쨍해졌다. 정말 이상한 날씨.
나는 따가운 햇빛도 막을 겸, 우산도 말릴 겸 우산을 펼쳤다. 작은 아이는 질색하며 우산을 왜 쓰냐고 펄펄 뛰었다. 왜...? 해 있을 때 우산 쓰면 법에 걸리냐.....?
작은 아이는 그대로 내게 등을 보이며 성큼성큼 앞서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들과 나의 거리는 멀어졌고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지만 따로따로 집에 도착했다.
혼자 집으로 걸어가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제 맘에 안 든다고 가차 없이 돌아서서 혼자 가버리는 작은 아이의 행동과 마음에 서글프기도 했고, 사람답게 잘 키워보겠다고 늘 최선을 다해왔던 나의 모든 시간들에 대한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단순히 사춘기가 문제가 아니라 인성의 문제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는데, 저 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배려심 없는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이 되었다니.
집에 도착했고 난 곧장 작은 아이에게 갔다.
이 더운 날씨에 네 안경을 맞춰주려고 거기까지 간 엄마를 봤으면 왔냐고 알은체 정도는 해야 하는 거야.
누군가와 함께 카페에 갔다면 어느 자리에 앉을까 의견도 물어보고 뭐 먹을까 물어봐야 하는 거고.
사람을 앞에 두고 네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건 절대 안 돼. 그건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동이야.
같이 걷고 있었다면 같이 가는 게 맞아. 뭐 죽을 일 났다고 엄마를 버리듯 놔두고 혼자 가버리니!
이런 게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야! 말 한마디가 뭐가 그렇게 어려워?
넌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맨날 당연하게 받기만 해? 다 네 노예야?
넌 사람에 대한 관심도 없고, 배려도 없고, 말 한마디를 해도 기분 나쁘게 하고!
그런 너의 곁에 누가 남아 있겠어? 혼자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기분 나빠 정말! 오늘 너의 모든 태도가 정말 불쾌해!
작은 아이는 처음 보는 광인(狂人) 같은 엄마의 모습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쏟아낸 나의 태도도 인간에 대한 예의 바른 행동은 아니었다.
내 분노 때문에 작은 아이는 제대로 된 메시지를 못 알아들었을 확률이 더 컸다.
어느 밤,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예보에 없던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몸도 이어폰도 핸드폰까지 푹 젖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운동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도 없을 시간이라 의아해하며 들어서는데, 입구에는 수건도 깔려 있었다. 땀과 비가 엉켜 최악의 꿉꿉함을 발산하던 내 몸이 상쾌해졌고 기분도 좋아졌다.
"엄마 다녀오셨어요? 비 와서 다 젖었죠?"
큰아이가 다가와 내게 마른 수건을 건네주고, 나의 핸드폰과 이어폰을 받아가 마른 수건으로 닦은 후, 잘 건조되라고 마른 수건 위에 예쁘게 펼쳐 놔주기까지 했다.
큰아이가 말하길, 스카에 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많이 와서 엄마가 곧 돌아올 것 같아 기다렸다고 했다.
비 맞은 엄마가 돌아오면 젖어서 축축하고 찝찝할 테니 미리 에어컨도 켜두고 수건도 준비했다고.
짧은 시간 동안 바지런하게 움직였을 아이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아이는 무심한 듯 안 보는 척 해도, 비 오던 날 내가 해주었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한동안 외롭고 쓸쓸했던 나의 마음이 큰아이의 말 한마디에 치유되었다.
머지않아 아이들의 차가운 눈을 또 마주하겠지만 버텨낼 자신이 생겼다.
오늘의 따뜻한 눈빛과 말 한마디, 그리고 섬세한 배려를 꼭 기억해 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