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귀에 속삭여줘야 맛입니다
난 대체적으로 F형 인간이다. 우리 집 대문자 T형 세 남자와는 평행선의 관계다.
'너무 속상해서 빵을 샀어'라는 말에 거침없이 '무슨 빵?!'이라는 질문을 빛의 속도로 내뱉는 그들. 그들에게는 내가 참 이상한 사람이고, 나에겐 그들이 이상하다.
이런 세 남자에게 있어서 비 오는 날은 참 싫은 날 중의 하나로 꼽히지만 나에겐 그 반대다.
비가 오면 빗소리가 너무 좋다고, 빗줄기가 예쁘다고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게 앉아 있기도 하고, 또 비 오는 날이면 부러 운동이나 산책을 하러 나가거나 늦은 시각까지 혼자 깨어 음악을 듣기도 한다.
이런 나의 행동들이 그들 입장에선 매우 이상하다. 그러나 이젠 사는 방법을 깨달은 그들은 나를 보고도 시비를 걸지 않고, '왜 저래?' 정도의 의문을 혼자 삼키며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센스를 장착했다.
덕분에, 이제는 비 오는 날이면 분위기 있는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비 오는 날, 특히 비 오는 '밤'에는 음악을 듣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가족들 모두 잠이 들면 혼자 조용히 모든 불을 끄고 어두운 거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튼다. 이때 반드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 포인트다. 모든 감각이 귀로 집중되면서 음악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싹 잊히고 나와 음악만 존재하는 달콤한 시간이다.
좋아하는 음악의 장르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이전에 본조비나 신해철에 미쳐 있을 때는 '락'만 듣기도 했었고, 서태지나 듀스에 빠져 있을 때는 가요만 줄기차게 들었으며, 뉴키즈온더블록에 미쳐 있을 때는 팝송만 파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이 듦과 함께 융통성과 포용력이 커지면서 모든 장르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그런 거라 여기고 싶다). 심지어 학교 시험 때문에 억지로 외우곤 했던 클래식을 찾아 듣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었다.
클래식의 매력을 느끼면서부터 가끔 '나의 청력이 더 이상 뾰족한 음악들은 받아들이기가 거북해 이쪽으로 옮겨간 것인가, 아니면 진짜 클래식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일까?' 의문들을 가지곤 하지만 하여간 듣기 좋다.
특히, 머리가 복잡하거나 가슴에 울분이 쌓였을 때 묵직한 그 선율은 나를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 음악이라고는 오로지 '뽀로로와 노래해요'에 나오는 동요들이나 '로보카폴리' '터닝메카드' '또봇' 등과 같은 유아용 애니메이션의 주제곡 말고는 어떤 것도 접하지 못했다.
비는 어떤가. 비가 오면 음악을 듣거나 차를 마시기는커녕,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아이들이 마칠 시각에 과연 비가 그칠 것인가를 짐작해 보고 우산 배달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중요한 임무를 시행해야 한다. 비 오는 날은 단지, 힘듦이 가중되는 날이었다.
그런 이유로 한동안 비의 낭만과 행복한 분위기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비 오는 날에 음악을 들으며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찾아왔다.
최상의 분위기를 탈 수 있는 이상적인 조건은 '비', '밤', '혼자', '이어폰'이다.
이런 때 듣는 음악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그저 그날의 느낌대로 클래식을 듣거나 팝송을 듣거나 가요를 듣거나. 무엇이든 느낌대로. 그때그때 감성에 따라 라디오의 주파수나 플레이 리스트의 선곡이 달라진다.
행여라도 라디오 채널에서 랜덤으로 나오는 음악 중 내 마음에 맞는 곡이 선곡된다면 무척이나 '럭키비키'한 날이 되곤 한다. 음악만으로도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니 '비'와 '음악'은 참 신비로운 조합이다.
이전에는 모든 시간이 다 나를 위해 쓰였으므로 '혼자' 음악을 듣고 비를 보고 하는 이런 시간이 귀한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너무나 잘 안다.
이런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고 그리워했었나.
촉촉한 빗소리가 들리고 예쁜 구슬 같은 빗방울이 눈앞을 스쳐 내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혼자 생각하고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이 시간, 참 행복하다.
오늘 밤에도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