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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희 Jun 27. 2024

리드미컬할 것

#10초간쉬어

몇 번이나 망설였다. 정말 이것뿐일까. 그렇다고 병원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빨리 낫고 싶으면 운동을 쉬라고. 그저 가벼운 감기 몸살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금세 지나갈 줄 알았는데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알아내야 했겠지만 나에겐 대책이 더 시급했다.


회사를 그만두면 어떨까?

그러지 않아도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했잖아.

도서관 글쓰기 강연을 취소하는 건?

너보다 뛰어난 강사들이 정말 많다는 거 알잖아.


이런 자문을 해보았지만 나는 약속에 살고 약속에 죽는 인간이다. 언제 한번 밥 먹자는 말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다. 그러니 회사는 끝맺기로 한 일들이 남아 있어 당장의 퇴사는 곤란했고, 강사가 2주밖에 안 남은 강연을 펑크 내면 담당자가 얼마나 난처할까 싶었다. 어겨도 괜찮은 건 나 자신과의 약속인 ‘주 3회 이상 운동’뿐이었다.


나 자신과의 약속도 중요한데. 게다가 비로소 김종국을 이해하는 생활체육인이 되었건만, 역시 이해와 용납이 꼭 같이 가는 건 아니구나. 내 몸이 내 이해를 용납하지 못하는구나.


어디가 부러졌거나, 중병에 걸린 거라면 빨리 납득했을 텐데 아니었다. 이런저런 검사를 해보아도 내 병명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도 아닌 감기였다. 한 달 넘도록 코감기, 기침감기, 몸살감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이 감기 기운 하나가 모든 일의 효율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어느 날부터는 몸에 힘을 주어보아도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회사에서 마감이 있거나, 주말에 특강이 있으면 전날 저녁에 꼭 주사를 맞아야 할 수 있었다. 그래 봤자 감기 몸살용 주사였지만, 난 진짜 그 주삿발에 의지하며 봄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야 대수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남들 다 하는 거. 주 5일 출근, 주 3회 이상 운동. 거기에 어쩌다 글쓰기 강연(이건 좀 어렵지만 어쩌다, 니까) 정도였다. 어딜 멀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프로젝트를 이끄는 것도 아닌 고작 이 정도인데도 한번 효율이 떨어지니 무슨 날개 잃은 천사도 아니고 계속 모든 일에서 낙하하는 기분이었다. 매사에 의욕이 없고, 단지 미열이 있을 뿐인데 되게 아픈 것 같고, 한 달째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조금은 슬픈 것도 같았다. 원기를 잃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한번 잃은 원기는 좀체 돌아올 줄 모는구나. 원기 이놈, 꼭 변심한 연인 같구나.


그 와중에도 운동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를 받으며 발악했으나, 건초염만 심해져 마우스 한번 편하게 클릭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사범님이 계신 단체 대화방에 한 달간 운동을 쉬겠다고 알렸다. 나 하나쯤 쉰다고 도장에 무슨 지장이 있다거나 누군가 고독해하겠느냐만, 내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 다른 것도 아니고 운동을 쉬네.


뭔가 좀 억울했다. 1년간 운동을 그렇게도 열심히 했는데 왜 체력이 바닥인 거지? 나 복근 비슷한 거 생긴 거 아니었나? 허벅지에 근육 붙은 거 아니었어? 토요일 저녁 강연에 대비하여 아침에 주사를 맞으며 생각해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나 현상의 상태를 3음절로 묘사하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일관성, 전일성, 통합성이다. 각각의 요소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관되게 나아가는 것. 그래서 스스로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에 이르고자 애쓰고, 그렇게 애쓰는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 마치 수많은 부품이 각각 제 역할을 해서 설정한 기능을 완수하는 기계와 같은 상태, 그것을 나는 조화 혹은 영원함에 근접한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며 사랑해 마지않는다. 지난 1년간의 내 생활을 묘사하라고 하면, 바로 이 기계적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한데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기계가 고장이 나버린 거다.


이놈아, 바닥인 줄 알았냐, 바닥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내 인생이 이렇게 결심을 한 모양인지 티브이 뉴스를 연일 요란하게 장식하는 전세사기를 당해서 나는 굉장한 고비를 맞이한 느낌이었다. 출퇴근을 위해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강연에서 최악의 컨디션을 들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전세사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알아내고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입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운동을 딱 한 달만 쉬겠다던 결심은 두 달째로 이어졌다. 도장에서 유일한 나의 동년배인 다현 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 제희 님, 괜찮으신가요?

문자를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아니요. 안 괜찮아요. 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세력에게 큰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죽거든 도장에는…. 흑흑.

물론 나는 성숙한 사회인이니까, 씩씩하게 답장했다.

- 네 그럼요. 곧 도장에 복귀하겠습니다.


시간이 흘렀다. 좀비처럼 회사에 열심히 출근해 맡은 일을 하고, 그 와중에 나와의 미팅을 회피하는 임대사업자 집주인을 찾아가 필요한 서류 문제를 정리하고, 마치 도 변호사라도 된 것처럼 부동산 관련 법률 용어를 일상어처럼 사용하며 필요한 법적 절차를 밟고, 약속했던 강연도 모두 마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세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내 몸에 다시 긴장감을 부여해주어 마치 현란한 각종 발차기와 찌르기 기술로 악의 무리를 쓰러뜨리듯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얍! 얍! 얍! 비켜라, 이 부동산 시장의 악의 축들아!


그렇게 두 달이 금세 지나고, 석 달 차에 이르렀을 때 나는 더는 운동을 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컨디션이 아직 온전히 회복되진 않았지만, 더 쉬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땀 흘리는 무도인들이 숨 쉬는 곳으로.


도장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눈에 익은 얼굴들, 언제 들어도 귀에 정확하게 날아와 박히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수석사범님의 기합 소리. 사각백과 미트를 치는 발소리. 우르르 무리 지어 뛰어다니는 꼬마들의 발소리와 웃음소리. 아주 익숙하고 평화로워서 낯설었다.


전장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군인의 심정이 이럴까. 나는 마치 전리품인 양, 나 홀로 복귀를 기념하며 사 간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넣고선 허리를 휘휘 돌려봤다.


언제나 그렇듯이 30분간의 체력 단련이 먼저 시작되었다. 기본 스트레칭으로 먼저 몸을 풀었다. 그래, 그야말로 기본이다 기본. 그냥 대충 다리 벌리고 상체 접고 허리 돌리고 그런 거. 그런데도 땀을 뻘뻘 흘렸다. 가랑이와 허벅지와 허리가 아우성을 쳐댔다. 스쿼트와 버피로 넘어가서는 거의 호흡 곤란이 올 지경이었다. 아 내가 그래도 말이야, 1년 넘게 운동했는데 몸뚱어리야 이러기냐? 중간중간 한 세트가 끌날 때마다 있는 “10초간 쉬어”가 없었다면 결코 따라가지 못했을 거다. 온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점프스쿼트를 마쳤을 때 사범님의 자비로운 한마디.


“쉬어!”


비틀거리며 생명수의 근원지인 정수기로 향했다. 두 달 반은 너무 오래 쉰 거였구나. 필요 이상으로 오래 쉬어서 이 모양이 되었구나. 뭐든 쉬엄쉬엄 했으면 이 지경은 안 됐을 텐데.


그렇게 봄을 지나 여름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지난 계절 내내 겪었던 증상이 번아웃이었다는 진단을 내렸다. 몇 년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평생 우정과 사랑을 함께 나누리라 믿었던 오랜 인연들을 부득불 다수 정리했다. 그 여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바쁘게 지냈다. 복잡다단한 상황이 늘 차고 넘치는 회사에서는 늘 그렇듯 일에 매진했을 뿐 아니라 강연 의뢰가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았고, 그렇게 강연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글을 쓰다가 계획에도 없던 에세이 작법서를 출간했고, 10년째 미루던 운전면허증 따기에 도전해 기능시험 4수 만에 취득했고, 그 와중에 특공무술 수련도 했다. 오랫동안 인생에 “10초간 쉬어”가 없었던 셈이다.


도장에서 체력 단련을 하다 보면 어떤 세트든 한 세트를 마치면 사범님께선 “10초간 쉬어”라고 하신다. 체력 단련을 시킬 때에 유난히 자비가 없는 차석사범님은 그 10초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운동의 효과가 좋다고 말이다. 실제로 인터벌 트레이닝은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고전적인 운동법이라고 한다. 운동 사이 휴식기에도 심박수는 평소보다 높으므로 운동량에 비해 단시간에, 많은 칼로리를 소모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쉬어주어야 그 훈련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순간에 알맞은 쉼은 ‘강약 조절’에서 ‘약’을 맡고 있지만, 그 약은 강을 뒷받침해주는 필수 요소다. 모든 활동에 강, 강, 강만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강이 아닐뿐더러 운동의 지속력도 떨어진다. 글을 쓸 때에도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을 적절히 사용할 때 기분 좋은 리듬감이 생기듯 운동도 강하게와 약하게를 적절히 섞어줄 때 리드미컬하게 지속할 수 있다.


도장에 온 지 한 시간 후 여기저기 찢기고 축축해지기까지 한 휴지 조각 같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강약중강약을 잊지 않기로 하면서 말이다.



http://aladin.kr/p/bqo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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