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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희 Jun 24. 2024

완전 행복해져 볼 것

#러닝

지난달부터 예고되었다. 11월부터는 인근 천변을 2킬로 달리겠다고. 그때는 9시 성인부와 8시 청소년부가 함께하기 때문에 8시 30분에 모인다고.


오, 달리기!

내가 정말 꼬꼬마 시절부터 체육 시간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이유 중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그것. 그것도 2킬로나? 어느새 어엿한 생활체육인이 된 나는 뜻밖에도 싫지 않았다. 초겨울이 되고 운동 후 집에 갈 때면 땀이 맺힌 목덜미를 스치는 찬바람이 몹시 상쾌했기 때문에 그 바람을 맞으며 달리면 또 얼마나 상쾌할까 싶었다. 게다 학생 때처럼 빨리 달려서 몇 초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되니 이젠 싫을 게 하나도 없어진 셈이다. 도장에 다니고 있을 뿐인데 어쩐지 달리기 동호회 모임에 든 것 같은 아주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편안한 저지 소재의 하의를 입고 신나게 도장에 갔다. 이미 세 명의 성인과 다수의 청소년이 출석한 상태였다. 수석사범님은 이상적인 달리기 자세를 설명해주신 뒤 가볍게 몸 풀기 운동을 시켰다. 그러곤 조를 편성했다. ‘잘뛰조’와 ‘못뛰조’로. 도장에 다닌 지 어언 8개월 차가 된 데다 이상하리만치 달리기 수업이 좋기만 나이므로 잘뛰조에 가야 마땅하건만, 사범님은 당연하다는 듯 못뛰조로 나를 보냈다.


성인부는 전원 못뛰조였고, 청소년부의 일부도 못뛰조로 편성되었다. 이 도장에 오자마자 내게 큰 가르침을 하사했던 은수와 지수 자매가 못뛰조의 일원이었다. 그간 성인부의 다현 님과 이 자매가 부쩍 친해진 덕분에 우리 조의 분위기는 훈훈함 그 자체였다. 서로 대충 뛰자며 덕담을 나누기도 했다. 자매 중 동생인 지수가 내게로 왔다. 나는 지수에게 주접을 한번 떨며 친목을 도모하기로 했다.


“우리가 같은 조라니 짱 좋아.”


짧은 엄지를 들어 올리자, 지수가 빵 터졌다. 짱 좋대. 짱이래. 하하하하. 역시 애들은 아재 개그에 관대하다더니,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워. 덕분인지 지수는 천변으로 걸어가는 동안 부쩍 내게 친근감을 보였다. 팔짱을 끼는가 싶더니 손을 잡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자신이 예체능은 다 잘하는데 영어가 재미없어서 큰일이다, 국어랑 수학은 보통이다, 사회는 잘하고 있다. 곧 이사를 가는데 무척 아쉽다(그랬다 이 자매는 다른 지역으로 다음 달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도 모처럼 지수와의 대화가 즐거워서 최대한 큰 반응을 보였다. 영어는 원래 재미없지 누가 재밌대? 국어랑 수학을 보통씩이나 해? 대박.


마침내 천변에 도착한 우리 못뛰조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지수는 뛰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이것 참 마음이 따스하고도 어색하군. 우리 우정이 이렇게나 끈끈했구나. 근데 지수야 그거 알고 있니? 니네 엄마 나이 말해주었을 때 놀랐어. 나랑 동갑이더라. 차마 동갑이라고 말 못했어. 왜냐면 우린 친구니까. 내가 몇 살인지 알 길 없는 지수는 마치 나와 절친한 사이이라도 되는 양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사범님이 뒤에서 쫓아오며 그렇게 달리면 안 된다고 말해도 듣지 않았다. 아니 짱 좋아가 그렇게 짱 좋았어?


그 옆에는 지수의 동생이 지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우리 셋은 절대 헤어질 수 없는 영혼의 친구처럼 그렇게 2킬로를 달리고야 말았다. 이렇게 해서 과연 운동이 되겠냐 싶은 속도와 자세로 달렸지만, 그래서 제대로 달려보고 싶었던 내 의욕은 성취되지 못했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즐거워서 나는 도장에 도착할 무렵 기분 좋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랬는데?


뒤에서 오던 은수와 다현 님이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아이스크림으로 시작된 러닝 뒤풀이 제안은 로제떡볶이를 먹자는 합의로까지 이어졌고, 그렇다면 로제떡볶이를 주문하는 동안 요 앞에 있는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 오자로까지 판이 커졌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 이제 그렇다면 엄마에게 허락받고 오세요.”


이들은 도장 옆 건물에 살고 있었다. 시간이 무려 밤 9시 반이 넘었기 때문에 납치하듯 이들을 데리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엄마의 반대라는 난관에 부딪혔다. 아이스크림과 떡볶이에 대한 열정은 어마어마해서 자매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다시, 다시 조르고 졸라서 마침내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곤 우리와 파자마 파티 기분을 내기 시작했다. 은수와 다현 님이 배달 앱으로 떡볶이를 주문하는 동안 지수와 그 집 막내와 나는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아이들은 참 바르게 자라고 있었다. 이것저것 다 먹고 싶은데도 그 욕심을 자제하느라 애쓰고 용쓰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고르라고 말해도 최소한의 것만 주문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나 돈 벌잖아요. 회사 다니거든요.”

“와 회사 다녀요?”

“그럼. 돈 많이 벌지. 빨리 먹고 싶은 거 다 가져와요.”

“아니에요.”

”오다리도 세 봉지 사자. 한 봉지씩 먹으면 딱이네.”

“안 돼요. 한 봉지로 나눠 먹을 거예요.”

“헐. 나 곧 있으면 월급 받거든요. 기회를 놓치네.”

“진짜요?”

“당연하지. 엄마 아빠 것까지 포함해서 한 사람당 세 개씩 먹을 거 골라요.”


다 사자, 안 된다 이런 실랑이를 제법 오래한 끝에 한 사람당 두 개로 합의를 보았고, 그들은 입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곧 떡볶이가 배달될 곳으로 가며 아주 신이 나 있었다. 지수가 말했다.


“저 정말 행복해요.”


나는 그 말이 너무나 놀라워서 웃음을 참았다.


“진짜?”

“네 최근에 오늘처럼 행복한 날이 없었어요. 아이스크림 진짜 좋아해서 하루에 열 개도 먹을 수 있거든요.”

“그럼 열 개를 사지 그랬어요.”

“안 돼요. 너무 비싸요.”


초등학생이 이렇게 소박하고 소탈했나? 요즘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 따진다는 살벌한 이야기만 듣다가 지수를 보니 신인류를 만난 듯했다. 어쩌자고 이렇게 올바를까? 어쩜 이런 거에 이 정도로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지수만 할 때 어땠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수 같지는 않았다. 사춘기가 빨리 와서 비련의 주인공 놀이를 꽤나 많이 하다가 담임 선생님께 불려가 상담을 받은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정말 행복해요?”

“네 진짜요. 감사해요.”

“와, 그럼 이사 가기 전에 또 아이스크림 사줄게요. 나는 회사 다니니까.”

“아, 아니에요?”


하하하. 그런데 왜 웃어?


“12월 둘째 주에 또 이렇게 먹을 거니까 엄마한테 미리 허락받아요. 작별 파티라고.”

“와. 완전 행복해요.”


완전? 진짜?


“나도 완전 행복해.”


떡볶이를 먹으면서 자매들은 자신들의 MBTI가 무엇인지 이야기해주고, 사범님들 중에 누가 더 좋은지 고백하고, 언제 사람과 친하다는 기분이 느끼는지도 말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첫째 은수의 말이었다. 그들의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하나님은 기도하면 다 들어준다고. 그러니 자신들이 이사해도 우리가 꼭 다시 만나면 좋겠다고, 문자 하고 전화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선 문자랑 전화하는 건 당연히 좋다고 말했다. 그다음엔 갈등했다. 하나님이 다 들어준다는 건 사실 뻥이야, 이렇게 말해야 했기 때문인데 특공무술인의 인내심으로 자제하며 대답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믿을 수도 있겠네요. 간절히 바라면 노력하게 되고 그러면 이뤄질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러면 역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꿈은 이뤄지겠네요. 


아이들이 그렇게 행복해하는데 좀 거짓말을 한들 어떻단 말인가. 못 달리는 조에 들어가도 즐거울 수 있고, 값싼 아이스크림과 분식에도 이렇게 기쁘고 흐뭇할 수 있다니, 비록 이들과 의 인연이 잠시였대도 말해주고 싶었다. 


나도 완전 행복해. 


이렇게 사사로운 것으로도 풍요로운 기분을 느끼는 날도 있는 삶이니, 비록 기도한다고 모든 게 다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꿈이 실현된 것만큼이나 행복해.



그림: 윤예지 작가님

http://aladin.kr/p/bqo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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