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때와 다름없는 퇴근길이었다. 동네에 도착했는데도 사방이 훤했다. 차가운 공기에 어깨를 옹송그리며 귀갓길을 재촉하던 게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기분 좋은 봄바람이, 그 속에 여름의 기운을 머금고서 불어왔다.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행복해.
이런 기분은 참 오랜만이었다. 몇 년 사이 인생에 여러 변화가 생기고 그에 적응하느라 여력이 없었기에 행복이란 감정이 조금 낯설었다. 기포 몇 개가 뾱뾱 소리를 내며 올라오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할 수 있다면 두 손으로 그 뾱뾱을 감싸 쥐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성실하게 제 일을 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겨울 다음에 봄이, 봄 다음에 여름이 오는 그런 패턴들 말이다. 걷기도 그런 유 중 하나다. 도보 25분인 거리를 날마다 거의 같은 속도로 걸으면 예상한 시간에 집에 도착한다. 걷기만 해도 목적지에 닿는다는 건 또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의지대로 되는 일이 생각보다 적은 삶에서 때에 맞추어 계절이 변해주고 걸어서 귀가하는 일쯤은 뜻대로 되어도 좋으니까 신나게 걸었다. 좋은 기분으로 충만한 덕분에 대로변 차량 소음도 견딜 만했다. 10분쯤 걸었을 때였다.
어이!
앳된 목소리들의 합과 우렁찬 목소리 하나가 귀에 꽂혔다. 소리의 진원지를 올려다보니, 간판에 ‘특공무술’이라고 쓰여 있었다. 음, 특공무술이라. 특별하게 공격하는 무술의 준말인가? 연이어 들리는 기합 소리에 무협 만화와 영화에 빠져 지내던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토요일이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잽싸게 싸서 교실을 나가려던 차였다. 담임선생님이 물었다.
“뭐 좋은 일 있니?”
“네! 〈취권〉 봐야 돼요.”
“그게 그렇게 좋니?”
“네!”
그날 봄볕은 따사로웠고, 바람은 상쾌했다. 그 바람과 함께 달려서 흙냄새 가득한 논두렁과 밭두렁을 지나 안방 티브이 앞에 앉았다. 설렜다. 그때의 날씨와 기대심과 흥분은 이따금 느닷없이 되살아난다. 나에게 이소룡과 성룡과 이연걸은 존재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주인공이었고, 해적판으로 나돌던 『권법소년』, 『용호야』, 『용소자』 등의 권법 만화책은 당시 시골 마을에 사는 한 초등생의 마음을 풍선처럼 두둥실 떠오르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걸음걸이만 봐도 무예의 내공이 깊은지 얕은지 알아보는 고수들의 세계라니, 너무 멋있잖아. 지금 보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이 난무하는 창작물이었지만 정신과 몸을 단련해 맨몸으로 악당과 싸우는 그들, 그리고 반드시 이기고야 마는 서사가 나를 안도시켜주었던 듯도 하다.
‘어이!’의 진원지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저 아이들은 행운이다. 어려서부터 무술을 배우다니. 나도 배우고 싶었는데.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그곳을 올려다보았고, 얼마쯤 지났을 땐 뜻밖의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럼 나도?’
한 번 그런 마음이 들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어 어느 평일 저녁엔 관장님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아, 젊으시네. 관장님도 젊고, 수강생들도 젊네. 아니 어리시네. 이야, 내가 다녀도 되는 건가? 절로 자격지심이 들었지만 입관하고 출입한 지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간다.
그리고 무언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운동하는 게 대수로운 일이어서는 아니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피티를 받고, 골프를 치고, 요가나 필라테스를 한다. 무술도 특별할 것 없는 여가 활동이다. 그저 이 운동이 나에게 남다르게 다가온 건, 몸치인 건 그렇다 치고 뭘 배우겠다고 어딜 다닌 게 학교 이후로 여기가 처음이어서다.
더욱이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한다. 일과를 마치면 바로 집으로 가 잠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일로써가 아니라면 낯 모르는 이들이 많은 곳에 굳이 가지 않는다. 한 번의 약속이 있고 나면 한동안 약속을 잡지 않기도 한다. 자연히 낯모르는 이들과 빨리 친해지지 못한다. 예측 불가능성을 잔뜩 품고 있으면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 유일한 것은 아마도 픽션뿐이다. 그랬는데 이 특공무술로 인해 어쩌다 보니 어느 평일저녁에 ‘퇴근 후 곧장 귀가’ 패턴에서 벗어났다.
특공무술 기본자세 1번과 2번은 ‘공격과 방어’다. 말하자면, 이 글은 내가 드물게 내 인생에 도전장을 내민 ‘공격’의 기록인 셈이다. 약 40년간 흔들림 없던 생활 패턴이, 운동이라곤 도보 이동 말고는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생각보다 유연하고도 즐겁게 이 공격에 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몸과 정신의 변화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특공무술만의 독특한 동작과 원리를 통해 삶의 지혜도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이 변화의 기록을 새로이 무언가에 도전해보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주저하는 분들에게, 특히 너무 늦은 건 아닌가 싶어 시작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함께 첫발을 내디뎌보자는 의미에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