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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희 Jun 13. 2024

바닥을 쳐도 다시 올라올 것

#후방낙법

내가 2023년 가장 많이 본 뉴스 카테고리는 부동산이고,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키워드는 ‘바닥’이다. 그다음 ‘고금리’, ‘전세 사기’, ‘역전세’ 등의 단어도 내 마음을 크게 동요시켰다. 들어만 보면 좋았을 그 유명한 전세 사기를 나도 당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살 수 있는 데서 적당히 살아왔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부동산 뉴스 기사들에 부화뇌동하며 세 계절을 보냈다. 어찌어찌 전세금을 돌려받게 된다면 비교적 정상적인(?) 가격의 다른 셋집이나 내 집을 구할 수 있으니 ‘바닥’이란 반가운 말이 되고, 못 찾는다면 꼼짝없이 임대인에게 묶인 내 전 재산은 아무 힘이 없으므로 ‘바닥’이란 더욱 슬픈 말이 되었다.


‘바닥이면 뭐 하냐, 그래서 주인이 못 준댄다’.

‘뭐야! 벌써 바닥을 다져? 아니야, 더 내려야지! 더 더 더!’

‘인간의 바닥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지만 집값의 바닥은 더봐야겠다! 그런데 나 돈 찾을 수 있니?’


고약해지려는 심보를 간신히 추스르며 그해의 두 계절을 나고 가을이 되었을 때 간신히 전세금을 찾기는 했으나, 그사이 집값은 수많은 뉴스 기사처럼 바닥을 찍고 올라온 데다 금리는 신나게 상승 중이었다. 봄만 해도 전세금만 찾으면 은행과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우정의 서약을 맺고 붉은 인주로써 피를 대신하며 내 집 마련을 도모해보고자 했으나, 결국 다시 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후 계속 올라가는 금리를 보며 잘했다고 생

각했다. 그래, 한날한시에 죽자던 세 남자의 결의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지.


흔히 인생에서 큰 시련을 만나면 ‘바닥을 쳤다’라고들 표현한다. 정말 오갈 데도 없고, 당장 한 끼 먹을 식량도 없고, 가족과 친구도 모두 떠난 상황이 아니라도, 그만큼 몸과 마음이 힘든 상황일 때 그런 극적인 표현을 쓴다. 이에 따라오는 모범적인 위로도 있다.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어.’

착각이다.

바닥을 쳤다고 누구나 다 올라갈 수는 없다. 어떻게 떨어졌느냐에 따라 바닥의 바닥으로 내려갈 수도, 다시 올라갈 수도 있지 싶다.


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 특공무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 수석사범님의 말씀에 따르면, 특공무술의 모든 기술이 중요하지만 떨어지는 기술만큼 유용한 것도 드물다. 무릇 특공무술인이라면 사정없이 떨어져도 다시 올라오는 비법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 기술을 흔히 ‘낙법’이라고 부른다. 업어치기나 날아차기 같은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인해 나가떨어지거나, 길 가던 중 격하게 자빠지게 될 때 적절한 자세를 취해 충격을 완화하는 방법을 말한다.


크게 네 가지 기술이 있다. 전방낙법과 후방낙법, 좌측방낙법과 우측방낙법이 그것이다. 이날은 전후방낙법을 배웠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우선은 그저 따라 했다. 첫 번째,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린 뒤 무릎을 굽힌다. 두 손바닥으로 가슴팍에서 세모를 그린 뒤, 엎드려뻗쳐 하듯 몸을 뒤로 쫙 빼면서 발과 팔로 착지하는 동시에 머리를 왼쪽으로 재빨리 돌린다. 이것이 전방낙법이다.


두 번째, 똑같이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무릎을 굽힌다. 두 팔을 가슴 위에서 엑스자로 교차한다. 그러곤 양팔로 바닥을 탁 치면서 뒤로 넘어진다. 바닥을 세게 쳐야 한다. 그때 생긴 반동으로 머리와 다리를 들어 올려 시선은 배꼽에 둔다.


다른 자세이지만 핵심은 같다. 머리의 움직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머리는 절대 다치지 않아야 하므로 옆으로 돌리고 위로 쳐든다. 영화 속 좀비들에게도 머리란 얼마나 소중한가. 결국 낙법이란 머리를 보호하는 기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처음 해보는 동작이니 둘 다 어려웠지만 나는 후방낙법에서 훨씬 고전했다. 뒤로 넘어져야 하는 게 생각보다 무서웠다. 뭣보다 이놈의 머리가 문제였다. 등이 바닥에 닿는 순간 머리를 슝 들어서 배꼽으로 향해야 한다고, 그게 중요하다고, 안 그러면 뇌진탕 걸리기 딱 좋은 자세여서 낙법을 쳤다고 볼 수도 없다고 사범님이 여러 번 강조했건만 좀처럼 목이 가누어지질 않았다. 양손으로 바닥을 치며 뒤로 자빠질 때마다 내 목 관절이 고장 난 인형처럼 흔들거렸다. 나보다 늦게 운동을 시작한 분도 고개를 잘 드시는데, 나의 목은 앞뒤로 오가며 꺾이다가 결국 뒤통수를 바닥에 처박았다. 골이 울리고 뇌수가 출렁였다. 위장도 요동쳤다.


왜일까.

왜 해도 해도 안 될까.


사범님은 목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서라고, 목뿐 아니라 몸 각 부위의 근육을 발달시켜나가면 훨씬 좋아질 거라고 했으나 정말 그게 가능한지 확신이 없었다(실제로 나는 2년 차에 접어들어서도 목을 잘 가누지 못했다).

실패를 거듭하자 궁금해졌다. 대체, 내가 누군가에게 낙법을 쳐야 할 만큼의 강한 공격을 당하고, 길 가다 격하게 자빠질 일은 또 얼마나 있을까. 후방낙법은 못해도 괜찮지 않을까? 네 속은 내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수석사범님이 다가와 낙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화를 들려주셨다.


“제가 몇 년 전 산에 갔다가 폭포 위를 지나는 길이었는데 이끼에 미끄러져서 몇 미터 아래로 구르게 된 거예요. 한 3미터쯤 되나. 사람들이 전부 제가 죽은 줄 알았대요. 그런데 저는 운동을 오래 했잖아요. 본능적으로 얼굴을 배꼽 쪽으로 처박고, 몸을 둥글게 말아서 머리를 보호하면서 구른 거죠. 그때 어깨 같은 데만 좀 다치고 멀쩡했어요. 그만큼 온몸을 배꼽으로 향하게 하여, 특히 머리를 말아 넣으면 심각한 부상은 입지 않을 확률이 올라가는 거죠. 물론 저는 운동을 오래 했으니까요.”


과연, 운동을 오래 한 자의 자부심과 이 늦깎이 수련생을 포기시키지 않겠다는 결의가 눈빛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군요. 낙법이란 그렇게 소중하고 유용한 기술이군요. 길 가다 느닷없이 자빠지는 데엔 제가 또 일가견이 있으니까요.


처음 접했을 때 이 낙법이란 말이 멋지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음절이 갖는 뉘앙스에서 단호함이 느껴지고, 의미 면에서도 그렇다. 떨어지는 법이라니. 이 말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누구나 추락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살면서 넘어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몸이 다치는 일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사건 사고에 누구라도 엮여들 수 있다. 그걸 시련이라고 부른다면, 그 시련이 꼭 내 신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만 이르지는 않는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시련이란 빈도나 수위에서는 차이가 날지라도 사람을 가리지는 않는 법이다.


그렇게 보자면 나도 사범님처럼 자부심 가득한 눈빛을 발사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이만큼이나마 지내는 것을 보면, 머리만은 어떻게든 보호해왔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구라도 오랫동안 사랑하고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동료가 나를 모함에 빠뜨릴 수 있으며, 도전하는 크고 작은 일에서 실패할 수도, 이런저런 물리적 폭행을 당할 수도, 나와 가족이 질병으로 인해 고생할 수도 있다. 세상의 많은 불행이 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놀랄 일이 아니다. 다만,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는데도 현재 제 인생을 오롯하게 꾸려가고 있다면, 여기저기에 상흔을 남겼을지는 몰라도 분명 가장 중요한 머리만은 잘 보호했다는 뜻이다. 인생이 가하는 공격에 일단 나가떨어지긴 했으되, 마지막 순간엔 낙법을 그런대로 잘 쳤다는 말이고, 내가 그런 사람 중 하나인가 자문해보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림 ⓒ 윤예지 작가님, 후방낙법



한 사람의 인생에서 머리란 무엇일까. 이것이 정답이다, 말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건 없는 듯하다. 개인의 가치관이나 성향, 처한 상황에 따라 시련을 버텨내는 동력이 돼주는 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있다면 이런 것들 아닐까.


시련은 지나간다는 믿음.

어떤 일이든 포기하지 않는다면 일정 수준에는 도달해 있으리라는 보편적 원리.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므로 나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수 없다는 사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쉬이 확신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함.

그러니 더욱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자 애쓰고, 그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


살다 보면 이 ‘머리’들이 위험해지는 때가 또 오겠지만 제대로 떨어진다면 결국 무사한 내일이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내가 비록 특공무술의 후방낙법은 잘 못해도 인생의 후방낙법은 좀 할 줄 아는 듯해서 “에헴” 소리를 내고 싶었으나, 출렁대는 뇌수와 요동치는 위장 때문에 많이 어지럽고 메슥거렸다.


다음 날 체육관에 가자 차석사범님이 물으셨다.


“제희 님, 컨디션은 어떠세요?”

“두통이 너무 심하더라고요. 후방낙법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 가벼운 뇌진탕이라고 볼 수 있죠. ”


뇌진탕? 그런 말을 그렇게 태연하게 내뱉으시깁니까?


“계속 연습하시다 보면 나아질 겁니다. ”

“뇌진탕인데요?”

“자, 운동하러 가시죠.”

참으로 호방한 무도인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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