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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희 Jun 06. 2024

그까짓 것 대충 할 것

특공무술이 가르쳐준 인생 호신술 #기본자세연결형

“으아아아.”


처음으로 운동한 다음 날, 내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소리였다.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사범님이 이 운동 초심자를 배려해 다른 수강생들에 비해 절반 수위로 훈련을 시켰는데도 심각하게 욱신거렸다. 봄맞이 피티를 시작한 다른 팀의 팀장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도중 “으아아”, 사무실로 되돌아오는 길에도 번갈아가며 “으아아아” 했다.


저녁이 되고 도장에 갈 시간이 되자, 역시 부담이 됐다. 삭신이 쑤신 건 둘째 치고 낯가림이 심한 게 문제였다. 태어난 지 수십 돌을 맞이했건만 아직도 낯을 가린다니, 스스로도 아 이건 어디다 말하기 이제 좀 그렇네 싶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인간들도 세상에는 있고 생각보다는 많다. 갑자기 한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생소하고도 과장된 자세를 취하며 운동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남다르게 어색한 일이었다.


또 하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건, 미성년 수강생들 사이에나 같은 성인이 끼어서 분위기를 흐릴까 하는 염려였다. 한창성장 중인 학생들이 모여 즐겁게 운동하는 시간에, 부모 세대인 내가 끼어 운동을 한다면 어떨까? 불편하지 않을까? 보아하니 신체 사이즈는 그들의 또래라 해도 하자가 없는 몸이란 점에 용기를 내보았지만, 언제나 ‘낄끼빠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복잡한 심리를 지녔을 십 대들 사이를 누벼도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런 마음은 사범님도 마찬가지일듯싶었다. 코로나19로 성인반이 휴지기인 상황에서 노(老)일점이 섞여 들어온 것 아닌가. 


훗날 이건 일리 있는 우려였단 걸 알았다. 사범님의 모든 수업은 청소년 기준이어서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고도 남는 기운을 주체 못 하는 십 대 수강생들과 나는 같은 수준의 체력 단련을 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이것 참, 부득불 생각이 복잡해졌다. 무도인이 되어 호연지기를 기르고, 기초적인 호신술로 내 몸을 최소한으로 지켜내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내 성격이었다. 뭔가를 충동적으로 시도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시작한 일은 웬만큼까지 하는 편이었다. 관계든 일이든 취미 활동이든 그만둬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까지, 선택한 이상 쭉 간다. 게다가 한 달 수강료를 이미 결제하지 않았나. 도장의 청소년 선배들은 양육자가 보내주시겠지만, 나의 투자자는 자신이거든요. 그래서 또 갔다. 운동 동료들이 계신 곳으로.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호방하게 인사하고 싶었지만, 수줍은 막내답게 조용히 환복하고 나왔다. 오늘의 몸 풀기 시간은 지난 하체 운동으로 온몸이 쑤실 나 같은 생도를 위한 근육 풀기였다. 줄넘기를 했다.


하아, 이 얼마 만에 해보는 줄넘기더냐.


요즘 학생들은 줄넘기도 따로 체육관 같은 데에서 배운다던데, 시대 변화가 새삼스러웠다. 그냥 운동장에서 애들이랑 대충 놀다 보면 저절로 하게 되는 게 줄넘기의 양발 뛰기, 한 발뛰기, 번갈아 뛰기, 2단 뛰기 아니었던가. 줄을 계속 넘기자 서서히 몸이 뜨거워지면서 뭉쳤던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사범님이 호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요, 제희 님! 몸이 뜨거워지면서 풀리고 있죠?”


암요, 암요.

그렇게 30분의 체력 단련 시간이 금세 가고, 각자 진도에 맞는 기술 단련 시간이 되었다. 오늘 내가 나갈 진도는 기본자세였다.


그림ⓒ윤예지


특공무술 기본자세의 시작은 공격과 방어, 평자세, 교차, 앞굽이, 이렇게 5종이다. 동작 다섯 개쯤이야 눈대중만으로도 바로 딱 익힐 수 있지 싶었지만 지난 호신술과 마찬가지로 사범님의 시범을 아무리 봐도 모르겠고, 뭣보다 자세마다 균형을 잡지 못해 우스꽝스럽게 기우뚱대는 꼴을 사범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 연출하자니, 심히 부끄러웠다. 


사범님이 잠시 다른 수강생들을 지도하러 가신 사이, 나는 고작 1분 미만 전에 반복하던 기본자세를 재현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학습 능력이란 게 아주 소멸된 걸까. 이런 정도의 암기력과 신체 능력으로 지구 종말이 오면 생존할 수 있을까? 응?


형편없는 암기력에 좌절하는 사이 차석사범님이 오셨다. 이 사범님은 나와 마찬가지로 사교성하고는 거리가 멀고, 나를 무슨 회사 이사님 대하듯 해서 피차 무척 조심스러운 가운데 우리는 각자의 임무에 충실했다. 끝없는 반복만이 이 늦깎이 수련생이 나아갈 길이라는 듯 “다시”, “다시”, “다시”를 주문하시는 것이었다. 전직 군인이시라더니, 과연. 우리나라 군대는 이분의 전역과 동시에 기강이 많이 흔들렸겠다 싶을 만큼 굳은 심지로 “다시”를 외치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기하게도 동작이 조금 몸에 익기 시작했다.


“이 기본자세는 어떤 기술이든 그걸 쓸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이기 때문에 꼭 익혀두셔야 합니다. 동작명도 기억해야겠지요. 평자세 잡으라고 하는데 평자세가 뭔지 모르면 되겠습니까. 구호 외치십시오. 기본입니다, 기본!”


그렇게 사범님은 단호하고도 공손하게 가르침을 남기고 다른 수강생에게로 가셨다. 그래, 이것이 특공무술의 기본이구나. 기본이란, 기본기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 무엇이지. 나는 사뭇 진지해져 맹연습을 했다. 어떤 분야에서든 기본이 없는 인간은 되도록 입을 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취권〉이라는 영화가 인기였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술꾼들이 얼핏 주정 비슷하게 하는 권법이 핵심 소재인 이야기다. 실제 중국 권법의 일종인 취권은 술에 취한 척 적을 속이며 하는 무술을 말하지만, 극중 인물들은 실제 취해 있다. 주인공이 아마도…… 성룡이었지?(아마도는 무슨 아마도냐.)


극중 성룡은 딱 봐도 알코올의존증이 심각해 보이는 어느 딸기코 노인 밑으로 들어간다. 이 괴짜 노인은 그래 봬도 은둔형 고수다. 성룡은 당장에라도 기술을 연마하고 싶지만, 사부는 제자 맘도 모른 채 청소와 빨래, 밥 짓기 등의 온갖 집안일을 시키고 무술은 단순 체력 단련만 시킨다. 지는 걸핏하면 외출해 지속 가능한 딸기코를 만들어 오면서, 제자에게는 일절 뭘 가르칠 생각을 보이지 않는다. 괴팍한 훈련법이 고되기도 하고 집안일도 지긋지긋해 가출하지만 바깥세상에서 비참하게 얻어맞고 돌아온다. 본격적으로 취권을 배우면서 깨닫는다. 이제까지 했던 온갖 집안일과 단순 체력 단련인 줄 알았던 그 모든 동작에 취권의 기본기가 다 녹아 들어가 있었더라는, 아, 이 듣기만 해도 설레는 무술 이야기.


실감이 났다.

이곳은 무도인의 세계다!



나는 흡사 물통을 짊어 나르며 어깨 힘과 몸의 균형감을 기르고, 빨랫감의 물기를 힘껏 쥐어짜며 전완근을 키우는 성룡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기본기,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이니까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기본기의 아름다움은 어떤 유일까? 그까짓 것 그냥 대충 해도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드는 내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멋이다. 정말 대충 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보일 뿐 그 무성의한 손짓 발짓에 수많은 반복의 역사가 숨어 있다. 마치 ‘꾸안꾸’와 같달까? 꾸민 것 같은데 안 꾸몄고 그런데 멋있는, 알고 보니 멋 좀 부려본 사람만이 연출할 수 있는 그 자연스러운 멋처럼, 진짜 실력자는 대충 하는 듯 보이는데도 괜찮은 결과물을 낸다. 주정인 듯 보이는 비틀비틀한 몸동작에 사실은 엄청난 공격과 방어의 비법이 숨겨져 있다는 취권의 원리처럼 말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한 유명한 소설가는 공모전에서 심사를 볼 때 맞춤법과 문법에서 어긋난 문장이 많은 글에는 낙제점을 준다고 한다. 나도 내 직업에서는 그와 같다.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편집자는 기본적으로 언어를 취급하는 사람이므로, 신입 사원을 만나면 단어와 문장을 얼마나 기민하게 다룰 수 있는지를 본다. 가령,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같은 걸 얼마큼 섬세하고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유연하게 사용하는지 본다는 말이다. 틀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완벽한 편집자는 세상에 거의 없다. 다만, 예민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노력과 감각이 묻어는 나야 한다. 그런 사람은 실수를 해도 보통 돌이킬 수 없을 수준으로 사고를 치지는 않는다. 물론 기본기 하나로 전부, 딱, 막, 엄청 일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기본기는 말 그대로 기본기여서 그 이상, 예컨대 왕성한 호기심과 시대 변화를 읽는 눈, 참신한 발상, 집요함과 꼼꼼함,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 탁월한 의사소통 능력 등 거의 모든 직업에서 요구하는 자질이 편집자에게도 요구된다. 그래서 기본기를 갖추고도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기본기가 없이 탁월한 편집자가 된 사람도 없다.


그러니까 뒤돌려 차고, 회전낙법을 하고, 상대의 손목을 꺾고, 업어치기로 회심의 공격을 가하고, 마운트를 타는 이 모든 기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으려면, 사범님이 말씀하시는 이 기본자세부터 제대로 잡을 줄 알아야 한다는 건 타고난 운동치인 나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이라고 강조하시는 사범님의 가르침대로 우렁차게 동작명을 외치고 싶었다


공격!

방어!

평자세!

앞굽이!

교차!


그러나 동작 이름과 자세 전환법을 금세 까먹었고, 이래서 과연 험난한 무도인의 길을 계속 갈 수 있을까 싶었다. 앞굽이 자세를 취할 때였다. 수석사범님이 다른 수련생에게로 가는 길에 툭 질문을 던지셨다.

“제희 님, 그거는 뭘 하기 위한 자세 같아요?”


음, 앞굽이 이건 말이지…… 나는 정말 멋지게 대답하고 싶어서 몇 초간 고민한 끝에 대답했다.


“장풍?”


사범님은 고개를 홱 돌리셨다. 기본기를 갖추기란 이렇게 멀고도 험한 것이었다.

그림ⓒ윤예지





<차례>


프롤로그_속는 셈 치고 시작해볼 것속는 것 #공격과방어


- 다만 즐거울 것 #손목빼기

- 그까짓 것 대충 할 것 #기본자세연결형1 

- 등을 보이지 말 것 #대련1

- 비겁함에 초밀착할 것 #백초크

- 있어야 할 곳에 있을 것 #기본자세연결형2

- 바닥을 쳐도 다시 올라올 것 #후방낙법

- 우정에 나이를 따지지 말 것 #대련2

- 일탈을 도모할 것 #연속안다리차기1

- 쉬엄쉬엄 통폐합할 것 #연속안다리차기2

- 시간을 흥청망청 쓸 것 #대련3

- 새로움을 기꺼워할 것 #도약발차기

- 상대의 신호에 집중할 것 #물구나무서기

- 불편함을 추구할 것 #수기방어연결형 

- 존재 이유를 잊지 않을 것 #회축 

- 시간과 사람을 독점할 것 #핸드스프링 

- 순간의 힘을 끌어올려볼 것 #기합 

- 오랜 친구를 귀애할 것 #대련4 

- 부끄러움을 자초할 것 #승급 시험 

- 완전 행복해져볼 것 #러닝1 

-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할 것 #윗몸일으키기 

- 몸으로 보여줄 것 #앞차기와 옆차기 

- 동료를 소중히 여길 것 #체력 단련 

- 반복이 주는 익숙함을 누릴 것 #러닝2 

- 리드미컬할 것 #10초간 쉬어 

- 무한히 상상할 것 #특공형 

- 겉멋을 부릴 것 #회축 

- 타인의 배움에 동참할 것 #찍어차기 

- 노련함으로 믿음을 줄 것 #대련5 

- 박수 칠 때 더 할 것 #연속안다리차기3 

- 10미터 거리를 확보할 것 #대검방어 

- 3초의 관대함을 베풀 것 #무술대회 

- 비고란은 비워둘 것 #승단 시험 


에필로그_보상이 없는 장래 희망을 품을 것



#특공무술 #생활체육 #호신술 #직장인운동 #운동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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