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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람 Nov 14. 2019

옳은 것을 알아보는 방법 - ④

 천사장은 타령사나이

 아버지의 장단은 술주정뱅이의 타령이었다. 하루에도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그 가락에 맞춰 걷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머니와 나와 율은 가족인 동시에 한 명의 사람이었고, 우리에게는 각자의 생활이 있었으니 말이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단 한 명만이 제어할 수 있는 박자에 따라 걸음을 딛는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철저히 아버지의 기분에 따라 빨라진 박자 때문에 발이 꼬여 넘어져도 그저 내 탓이거니, 하고 다시 걸었다. 그 때문에 욕을 먹는 것도 그냥 당연하다 여겼었다. 나는 이 상황의 이상함을 비교적 일찍 눈치챘다. 처음으로 여섯 시 이후의 외출을 허락받아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나는 불안함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양쪽 귀가 웅웅댔다. 친구들은 즐거워만 보이는데 내 이 불안함은 당장 집에 뛰어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 한 진정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듯한 이 두려움을 털어놓자 엄마는 소름 끼치도록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엄마는 늘 그랬는걸? 원래 그런 거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멋진 사람이었다. 멋진 사람은 당당했고, 멋진 사람은 강했다. 그는 하고 싶은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며, 타인을 상처 주지 않는 다정한 이였다. 그런데 엄마 말을 듣고 나니 지금처럼 살다가는 멋진 사람은커녕 바보 천치가 되고 말 거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세상을 잘 몰랐지만 고작 여섯 시 이후에 나갔다는 이유로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건 멋진 삶과 무척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였다. 내가 던진 질문은 알 속을, 엄마의 대답은 알 표면을 쪼았다. 그게 엄마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날의 문답이 내 알을 깨트렸다. 이날부터는 본능이 아닌 논리로 아버지의 방침을 의심했다.


 행동으로든 말로든 아버지가 가르치려 했던 것들을 먼저 모아 보았다. 말대답하지 마라, 부당한 일은 참아라, 귄위에 굴복해라, 나는 너를 버릴 수 있는 존재지만 너는 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세상에 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없을 것이다, 내 감정은 언제든 표현할 거지만 네 것은 언제나 숨겨져야 한다.... 다음으로 이것들을 지켰을 때 내가 될 만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정확히 내가 되고 싶었던 '멋진 사람'의 대극점에 있을 법한 인물상이 완성되었다. 수동적이고, 비굴하고, 무능한 존재. 아버지는 늘 우리를 사랑해서 하는 짓이라며 폭력을 정당화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세상에 나를 망치는 사랑과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가르쳤지만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나를 더 옳게 하는지 알아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잘못된 말과 뒤틀린 폭력은 종종 비처럼 내렸다. 우리 남매는 그 빗줄기 사이로 옳은 것을 찾아 붙들고 늘어져야 했다. 그게 행복한 삶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서였다. 아버지가 모진 말로 우리 손을 찔러 꼭 붙든 손을 풀어놓으려 한대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애정관계라는 새로운 장으로 무대가 바뀔 때까지 나와 율이는 나름대로 잘해나갔다. 각자의 애정 관계에서 나와 율이는 더 이상 조연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갈고닦은 경험치가 이 새로운 무대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문제는 애정 관계라는 무대도, 나의 경험치도 아니었다. 나를 무시하는 놈들이 잘해주는 사람들보다 편안하고,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들의 여유에 묻어가고 싶은. 연애는 다른 인간관계와 다르다 생각하는 내 자세였다. 한번 시도해보지도 않고 낯선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택하는 내 자세가 내 팔자를 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무시하는 놈들이 편해서 사귀기로 했으면 잘 지내기나 하던지, 편하다는 이유로 선택했지만 그들의 말버릇과 빤히 보이는 거짓말은 신경에 거슬렸다. 3개월, 혹은 반년. 내 편의대로 정한 기간 동안 그들을 관찰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초반에 우유부단하거나 희생적인 척을 했다. 그렇게 순진하고 만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나면 그들은 하나씩 단서를 떨어트렸다. 그 단서가 습관적인 거짓말일 때도 있었고, 과거의 돌이킬 수 없는 범죄일 때도 있었고,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일 때도 있었다. 이상하게 못난 놈들을 골라 껍질을 벗겨 얼마나 못난 놈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실망스러우면서도 재미있는 거다. 마치 현실 세계에서 하는 게임 같았다. 민낯을 확인하고 그들을 떠나면 또 한껏 피해자인 양 비련에 젖어드는 그들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여기까지 하고 나면 한바탕 역할 놀이를 한 것 같아 피곤했다. 게다가 이런 짓을 할수록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평범한 것. 과거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하지도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고, 다른 여자가 엮인 수라장과도 연이 없는 남자랑 평범하게 닭살 떨고 영화 보고 밥 해 먹으면서 우리는 평생 헤어지지 않을 거라며 한껏 착각에 빠져드는 것. 그리고 그 착각이 깨지면 다시 그 남자를 고이 보내주고 나는 집을 얻고, 연이 닿은 반려 동물과 백년해로하는 것.


 폭력의 기억도 사랑의 불확실성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할 나만의 성에서 사랑의 가장 맛있는 부분만을 골라먹는 것. 보시는 바처럼 나의 이상적인 삶 초기 모델은 약간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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