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의 삶
나와 율이가 성장하고 자아를 가져 원치 않는 처사에 저항할 때까지, 아니 우리가 그만큼 성장한 후에도 한참 동안 엄마와 나와 율이 세 가족은 한 덩어리로 취급되었다. 아버지에게 말이다. 오랜 직장생활로 점점 가정에서 유리된다 느끼는 아버지들이 많다. 이런 아버지들의 딜레마는 '미안하다 아가, 너를 안아주고 싶은데 이 벽돌을 내려놓으면 널 키울 수 없어'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되기도 했다. 가장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더 농밀한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는 동안 가정에서 아버지가 느끼는 소외감이 증가하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본인이 이 케이스에 속한다고 한평생 믿어 왔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결백한 피해자라 믿는 건 아버지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이러한 케이스에 속하지 않고, 술을 마실 때마다 나와 어머니, 그리고 율이를 '니들'이라 칭하며 한 덩어리 취급한 것은 우리가 아닌 아버지였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결같이 '남의 편'을 자처했다.
먼저 아버지는 자영업자였다. 게다가 가게는 어머니에게 맡겨 두고 소위 '바지사장'처럼 밖으로 돌 때가 많았다. 술자리에 동창회에 모임이란 모임은 다 쫓아다니는 바람에 몇 번인가는 어머니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지만 아버지는 제 분에 못 이겨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절하느라 이마에 피가 흘렀다던 인조-굳이 여기에 비교하긴 했지만 사료 상의 근거는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처럼 벽에 머리를 찧었다. 이럴 때면 늘 그랬듯 없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나와 율이는 엄마가 피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기서 뛰쳐나갔다간 언제가 됐든 크게 혼나기 십상이었다. 크레파스 끝이 멈춰 있었다. 나만큼이나 율이도 그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숨통 좀 터줘라 제발. 니들 때문에 구질구질한 내 인생 불쌍하지도 않냐.' 아버지가 크게 소리쳤다. 내가 그때 몇 살이었더라,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빠의 이마에 흐를 피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아빠가 불쌍한가?'라는 의문이 불안함을 뚫고 떠오른 것이 가장 먼저였다. 나는 아빠가 콩나물 500원어치 때문에 쩔쩔매는 모습도 본 적 없었고, 아픈 와중에도 나와 율이를 돌보느라 노랗게 뜬 얼굴에 산발을 하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엄마는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고 나간 적이 없었기에 아버지가 그 일들을 대신하느라 애를 먹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동창회 때문에 돈이란 돈은 다 가져가는 바람에 우리 학원 회비 때문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던 것도 엄마지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면 불쌍한 거는 엄마가 아닌가? 모두가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두 분은 속도위반도 아니었고, 굳이 조건으로 따지면 엄마의 집안이 훨씬 부유했으며, 아버지는 자식을 낳지 않으면 평생 운신도 못할 만큼 패주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자식을 낳은 사람도 아니었다. 크레파스를 들고 식당 한편에서 콧물을 먹으며 없는 척을 하는 입장이었지만 어린 머리에도 아버지의 언행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다.
'니들'이었다 우리는. 차라리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나와 율이가 아버지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심정적으로나마 아버지의 학대를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율이의 겉모습은 아버지의 거푸집이었다. 아버지가 나고 자란 집성촌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굳이 내 쪽에서 소개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아본 동네 어른들이 밤이니 곶감을 건네주는 게 일상이었다. 쪼끄만 게 야무지게 자리 잡고 앉아 선지나 천엽을 맛깔나게 먹는 것도 아버지 식성을 쏙 닮았다고들 했다. 그러니 출생의 비밀 설은 일찌감치 기각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아버지가 왜 그리 니들 타령을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하지만 나나 율이나 이미 몇 년쯤 전에 이해하기를 포기했으니 이유가 있다 해도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
'니들'이라는 말 뒤에는 어린이 인생 최대의 위기를 가리키는 말들이 따라오곤 했다. '니들 다 나가'나 '니들 때문에 살 수가 없다' 같은 말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최대한 작게 숨을 쉬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울지도 않고, 낮게 엎드려 지내다 보면 이 최대의 위기들은 곧 지나가기 마련이었으니까. 사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아버지 눈에는 우리가 플러버-아주 옛날 영화의 제목이다. 요즘은 액체 괴물이나 슬라임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처럼 보이기라도 했던 걸까. 아버지가 우리 셋의 인생을 '니들'이라는 말로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엄마와 나, 그리고 율의 자아는 그것을 표준 단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다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는 부처님 말씀처럼 삶의 각개전투를 자연스럽게 받아 들인 것은 나와 율이가 성인이 된지도 한참이 지난 후의 이야기다.
'니들'로서 우리의 삶은 울화통이 터지고 가끔 비참했지만 '니들'이 아닌 '너'였다면 여기까지 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니들'이 아닌 '천람'이 되어야 했을 때, 나는 불안했다. 나만 지키면 되는 삶은 가뿐해 보이면서도 뭔가가 도려내진 듯 서늘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