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지원 구내식당의 숨은 맛집
소송은 대개 피고 혹은 피고인의 주소지 관할 법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 주소지에 따라 나의 출장 장소도 달라진다. 나는 처음 찾는 법원에 재판이 생기면 2시간 정도 일찍 가서 법원을 둘러본다. 판사의 직장을 둘러보면 그 생각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지 않겠냐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징크스’가 됐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의 관할 법원이다. 올 1월 기준 이 지역의 합산 인구가 158만 명이다. 성남지원은 예상과 달리 낡고 아담했다. 협소한 부지에 컨테이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마치 법원이 아니라 자동차 조립 공장 같았다.
재판 2시간 전에 도착해 법원을 모두 둘러봤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하릴없이 법원을 서성이다가 별관 집행관 사무실 2층에 있는 구내식당을 봤다. 한 끼 때우자는 생각으로 아무런 기대 없이 올라갔다. 초라한 낡은 건물 2층에서 파는 ‘급식’이 맛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도 기억난다. 그날의 메뉴는 돼지고기애호박찌개, 느타리버섯볶음, 떡갈비, 김치, 밀폐 플라스틱 용기에 가득 담긴 맛김이었다. 주인아저씨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쌀밥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 줬다. 어릴 적 할머니가 해주셨던 집밥처럼 느껴졌다. 법원 구내식당 ‘급식’에서 이런 맛이 난다니 기가 막혔다. 오랜만에 정말 맛있는 한 끼를 먹었다.
게 눈 감추듯 맛있게 밥을 먹고, 고급 원두를 사용한다고 적힌 광고에 혹해 커피도 주문했다. 계산하면서 슬쩍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성남지원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구내식당을 운영했다면서 “아마 30년은 넘은 것 같다”고 했다. 커피를 내주며 주인아저씨는 수줍게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서울의 빈민들은 공권력에 의해 1970년대 집단 이주를 당했다. 빈민들은 황량한 땅에서 생존을 위해 ‘광주 대단지 사건’을 일으켰고, 그 수습책으로 1973년 탄생한 것이 지금의 성남시다. 1990년대 분당, 2000년대 판교가 들어서면서 성남시는 발전을 거듭했다. 쏟아지는 재판으로 1982년 설치된 낡은 성남지원은 화석처럼 켜켜이 컨테이너를 올렸다. 성남지원의 기괴한 모습은 숨 가쁘게 달려온 성남시와 많이 닮았다.
그 역사의 현장에서 수십 년간 밥을 지어온 주인아저씨의 삶을 떠올렸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윤오영 작가의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누군가는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감동을 빚어낸 셈이다. 다만 내가 낡은 건물을 보고 음식도 맛이 없을 것이라 넘겨짚었던 것처럼, 인생으로 빚어낸 감동들은 초라한 행색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 나는 청년이라 믿기에 어떻게 여생을 보낼 것인지 고민이 많다. 그날 먹었던 근사한 한 끼는 내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내가 인생을 들여 빚어낼 수 있는 감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 글을 읽는 청년들도 함께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다.
*동아일보에 2020.07.07 기고한 칼럼입니다.
*주인 아저씨 손자분께서 글을 전달해주셨고, 성남지원 식당 게시판에 칼럼이 붙어있습니다.
[참고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