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눈과 귀로, 지식은 머리로, 지혜는 가슴으로

27년차 전략가의 사색

by 도진

전략가로 살아온 27년 동안, 나는 수많은 보고서를 읽고 쓰며 정보의 바다를 항해해 왔다. 수치와 데이터, 시장 동향과 경쟁사 분석, 그 안에서 방향을 찾고 통찰을 도출하는 일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고, 말하자면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뚜렷해지는 진실이 있다. 정보는 넘쳐나고, 지식은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지만, 지혜만은 여전히 전략가의 고유한 몫이라는 것.


그리고 그 지혜라는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



정보는 눈과 귀로, 지식은 머리로


정보는 감각의 영역이다. 기사를 읽고, 리포트를 훑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트렌드를 체감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된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가 ‘사람’일 필요도 없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요약하는 일은 이제 인간보다 기계가 더 잘한다. 실시간 크롤링, 이미지 인식, 자동 번역, 자연어 처리. 검색창 하나에 단어 몇 개를 던지기만 해도, 그 아래에는 수천 개의 정보가 깔린다. 정보의 양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걸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 쪽이다.


이렇게 모인 정보를 구조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지식’의 몫이다. 이는 머리의 영역이다. 논리와 패턴 인식, 유추, 통계적 사고, 학습. 이조차도 인간만의 특권이었던 시절은 이제 과거다. ChatGPT를 포함한 AI 도구들은 과거 수일 걸리던 리서치를 몇 분 안에 마친다. 지식의 생산성과 전달 속도는 이미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정보가 ‘접속’이라면, 지식은 ‘정리’다. 그리고 그 정리는, 이제 인간만의 경쟁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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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혜는 가슴으로


그렇다면 전략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두가 정보를 갖고 있고, 지식의 품질 격차가 사라진 시대에, 전략가의 존재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답을 ‘가슴’에서 찾는다.


지혜는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다. 데이터는 우리에게 ‘무엇이 더 이익인가’를 말해주지만, ‘무엇이 더 맞는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건 결국 사람의 몫이다.


전략가의 판단은 논리로 시작해 직관으로 완성된다. 정량적 분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결정이 있다. 수치상으로는 55:45의 승부지만, 그 10%의 차이를 믿고 나아가게 하는 건 ‘가슴의 결’이다. 과거의 실패, 현장의 목소리, 시장의 기척,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 이 모든 것이 섞여 어떤 확신을 만들어낼 때, 전략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확신이 단순한 감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과 성찰에서 비롯된 것일 때,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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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진의 가슴을 여는 사람


하지만 전략가 혼자의 확신만으로는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전략은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즉 경영진이 행동해야 비로소 실행된다. 그래서 전략가는 설계자이자 전달자여야 한다. 기획자가 아니라 변화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메신저여야 한다.


전략이 머리에서 나왔다면, 실행은 가슴에서 비롯된다. 그 가슴을 여는 열쇠는 논리가 아니라 공감이다. 한 줄의 말이, 한 번의 제안이, 수천 페이지의 자료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리더는 수많은 보고를 받지만, 결국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에 결정을 내린다. 전략가는 그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



지혜의 커뮤니케이션


내가 존경했던 한 선배 전략가는 늘 “의사결정자는 숫자를 보는 게 아니라, 숫자를 듣는다”고 말했다. 어떤 숫자를 어떻게 말하느냐, 그 말이 경영진의 세계관을 어떻게 흔들고, 어떻게 납득시키느냐가 전략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뜻이었다.


“이 숫자는 우리를 이기게 하지 않지만, 늦게 움직이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이 방향이 맞다고 믿는 건,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 10년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들은 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수십억 원짜리 결정을 이끈 ‘말의 힘’이다. 전략가는 데이터를 낭독하는 사람이 아니라, 데이터 너머의 미래를 함께 그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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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전략가로 살아간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나는 여전히 전략의 가치를 믿는다. 지식이 흔해진 세상에서, 지혜는 더 빛난다. AI가 논리를 제공할 때, 인간은 통찰을 제공해야 한다.


전략은 머리로 쓰지만, 가슴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전략가의 일은, 그 가슴에서 나온 지혜를 다른 사람의 가슴에까지 도달하도록 ‘말로 옮기는 것’이다.


전략이란 결국, 결정의 예술이다. 그 결정을 이끄는 일. 그것이 내가 오늘도 전략가로 살아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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