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역사를 몸으로 쓰다 2(2017)

MMCA 과천관

by 돌레인

한 여인이 무대에 다소곳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커다란 가위가 놓여있다.

관객에게 이 여인의 옷을 잘라 가져가게 한다.
당신은 어디를 어떻게 자를 것인가...

하나둘 차례로 관객들이 올라와 머뭇거리며 치맛단이나 소맷단을 조금씩 잘라간다.
시간이 흐르자 과감해진 관객은 여인의 가슴 쪽을 노려 성큼성큼 잘라 나간다.
여인은 당황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드러나려는 가슴을 가리며 영상은 끝이 난다.

오노 요코 <컷 피스> 1965


존 레넌의 부인으로 더 유명한 '오노 요코'의 <컷 피스>다. 이 퍼포먼스는 현대미술 책을 통해 읽었으나 영상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역시 영상은 글보다 더 감각적이다. 오노 요코의 흐려진 눈망울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ㅠㅠ 그리고 뒤늦게 '예술가' 오노 요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우 치엥 창 <잊을 수 없는 연인> 2013


대만 현대미술 작가인 '우 치엥 창'의 이 작품은, 마술적 눈속임과 연극적 요소로 일본 식민지 시기 대만의 역사적 기억을 담아내고 있다. 저급함, 조악함, 싸구려 등을 나타내는 용어인 키치(kitsch)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왠지 할머니 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묘한 향수가 있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예술가가 현존하다 The Artist is Present> 2010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도발적 행위예술가로 유명해 '퍼포먼스의 대모'로 불릴 정도다. <예술가가 현존하다>는 나도 좋아하는 가장 감동적인 작품인데,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관객을 응시하던 그녀를 움직이게 한 건 30년 만에 만난 예술적 파트너 '울라이(본명 : 우베 라이지펜)'를 마주했을 때라고 한다. (최근에 이 작품에 대한 다큐를 봤다. 둘은 이 전시를 위해 미리 만나 기획을 했지만 전시회에서의 현장감 있는 감동엔 변함이 없었다. 후에 참여료 미지급 문제로 울라이가 소송을 걸었으나 그 또한 별개의 문제로 보였다. 현재(present) 서로를 마주하는 당신과 나는 선물(present) 같은 존재니까...)


이번 전시회에 함께 나온 작품 역시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19금으로 정해놨다.



마리나의 퍼포먼스는 발칸의 역사적, 문화적 토양을 근원으로 한다. <발칸 연애 서사시>는 발칸의 문화 속에서 회자되어 온 민속적인 '성(sexuality)'에 관한 영상이다. 발칸의 여성들이 대지 위에 둘러 서서 드러낸 젖가슴을 주무르며 노래를 부르고, 다른 한쪽에선 마리나의 노랫소리에 맞춰 남성들의 성기가 발기한다. 또 다른 방에선 마리나가 발칸의 성문화를 아주 교육적으로 열거하고, 발칸의 여성들은 넓은 대지를 뛰어다니며 자신의 성기로 비를 맞고, 남성들은 너른 땅 위에 엎드려 자위하고 있다...

이 영상들이 현대미술 감상자에게 부끄럽고 충격적이라면 이젠 촌스럽지 않을까... <균열> 전 이후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진 건 사실이다...@.@



타나카 코키 <모든 것은 모든 것이다> 2006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물건들도 예술로 재탄생된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서장훈이 늘 말하는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가 생각이 났다...ㅎㅎ 그러다 순간 이것이 실용성을 배제한 '예술을 위한 예술'인 건가 싶었다. 노동이 소소한 즐거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재미있었다.



이케미즈 케이치 <호모 사피엔스> 시리즈, 1965


일본의 덴노지 동물원과 신사이바시 쇼핑 거리 등에서 작가 자신을 동물 우리에 가둔 퍼포먼스다. 1878년 제3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식민지 원주민들을 전시했던 '인간 동물원'이 떠올랐다. 당시 세계열강들의 식민지 자랑을 앞다투어 벌인 셈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동물원'은 아주 가기 싫어하는 곳이다. 철창에 갇혀 조롱하는 관객들을 향해 분노하던 고릴라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알로라 & 칼자디야 <하프 마스트, 폴 마스트> 2010


이번 전시회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는 인간 깃발 영상이다. 미 해군에 의해 점령당했던 푸에르토리코 비에케스 섬에 대한 단편 영화 시리즈로, 23명의 체조선수가 차례로 등장해 만기(승리) 혹은 조기(상실)를 상징하는 깃발을 몸으로 세운다.



빌리 도르너 <도시 공간 속 신체들> 2010년대


도시 공간 속 틈새에 겹겹이 몸을 구겨 넣거나 끼워 익숙해진 공간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무심코 지나치는 주변 공간에 사람이 저렇게 끼여있으면 정말 놀라지 않을까?@.@





올라퍼 엘리아슨의 <미시적 움직임>은 일상의 움직임을 아주 느리게 표현한다. 이는 일본 그룹 '월드 오더'를 떠올리게 했다. 아래 유튜브 영상은 월드 오더가 한국에서 촬영한 거다. 낯익은 서울 곳곳이 이들로 인해 새롭게 보인다.







가브리엘라 망가노 & 실바나 망가노 <거기 없다> 2015


마지막 섹션으로 들어서자 앞에 커다란 화면에서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한 무리에 깜짝 놀랐다. 1920년대 소련에서 널리 유행했던 정치적인 프로파간다 연극 운동인 '블루 블라우스'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이 영상은 침묵의 강요, 집단적 폭력, 억압과 감시를 암시한다.

요즘은 온라인상에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을 서로 혐오하거나 특정 이슈에 한 쪽 말만 듣고 우르르 몰려가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쏟아내다가 그게 아니라고 밝혀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누구 하나 사과의 말없이 사라져 버리는 무리 말이다.
이는 이슈몰이를 하는 미디어나 기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 동조하거나 외면하는 것에도 개인의 용기 있는 판단이 필요하게 됐다.




산티아고 시에라 <10명의 노동자 등에 뿌려진 폴리우레탄> 2004


산티아고 시에라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신체를 최소한의 보수로 고용한 후 가혹하고 무의미한 일을 시키는 스페인 작가로 유명하다. 이 작품도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10명의 이라크 이주 노동자들을 최소 비용으로 고용한 후, 그들에게 방호복을 입히고 화학 폴리우레탄을 뿌려 하나의 덩어리가 될 때까지 행한 작업이다. 자본, 부조리, 권력, 착취가 보이는 영상으로 보고만 있어도 실로 고통스럽다.




미카 로텐버그 <노 노즈 노우즈 No Nose knows> 2015


굴에서 진주들을 알알이 훑어내고 그렇게 채취한 진주를 일일이 고르는 아시아 여성들과, 그중 한 아시아 여성이 돌리는 선풍기 바람으로 꽃 냄새를 맡고 재채기하며 중국과 이탈리아 풍의 국수와 파스타를 생산하는 서구 여성이 서로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모든 상품과 이미지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장치를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여성의 반복적인 신체 노동임을 보여주고 있다.

총체적인 인간이 분업화될 때 결국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게 되어 소외되고 파편화된다는 사회현상은 어디나 산재해 있다. 간혹 망각하는 이런 현상을 번쩍 깨우쳐 주는 일 또한 예술 특히 현대미술의 몫이란 생각을 했다. 미술사를 들여다봐도 최전방에 서 있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일이란 게 바로 이것이구나 싶다. 순응하지 말라...

장장 6시간이란 관람 덕분에 다리도 몹시 아프고 이해하느라 머리도 아팠지만, 현대미술이 뭔지를 조금 알 것 같은 좋은 시간이었다.





2017년 블로그에 올렸던 전시회 감상글을 정리하려 브런치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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