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트 누드전@소마
# 브런치팀으로부터 경고받아 그림에 전부 블러 처리함을 알립니다!(할많하않)
1970년대는 누드에 공개적인 정치 참여가 시작된 시기로써 페미니즘의 대두와 성과 인종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에 문제가 제기되던 현실을 반영한다.
마지막 전시장인 제6전시실로 가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로댕의 <키스>는 이곳 6전시실에 있다.)
20세기 초까지 누드화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의 벗은 몸을 그리며 남성적 욕망과 열정을 맘껏 드러낸 거다. 그러나 두 차례의 커다란 세계 전쟁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꿔 놓았다. 여성의 참정권과 페미니즘의 대두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터다.
여성 예술가 앨리스 닐의 이 그림 속 여성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솔직히 표현돼 있어 관람자도 편안해진다. 시선을 피한다거나 도전적이거나 과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가와 모델 간의 역학 관계를 새삼 돌아보게 했다.
기존의 모델들은 대부분이 여성이거나 살결이 흰 백인이었다. 흑인이나 유색인종을 다룬 그림은 아프리카나 타이티 섬 같은 제국주의 식민지를 배경으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줄스 가족>은 전위적일 수밖에 없다. 남자는 파이프 담배를 우아하게 쥐고 턱을 올려 관람자를 거만하게 내려 보고 있다. 하얀 소파에 걸쳐 있는 셔츠 속 여인의 얼굴 표정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의 표정이 아닐까...
이제 화가와 모델의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오달리스크가 된 남성이 에로틱한 포즈를 취하며 화가와 관람자를 유혹한다. 여성을 위한 그림이라 한들 뭐가 대수일까... 이제 남성이건 여성이건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열정을 자유롭게 드러내도 되는 시대이지 않나... 그러니 예술과 외설에서 외줄을 타는 것일 거다.
대상이 있는 회화를 '구상화'라 하고, 대상이 없는 회화를 '추상화'라 한다. 추상주의를 넘어 화폭을 전부 까맣게 표현한 '절대주의'에서 회화는 끝을 본 셈이다.
화가들을 그야말로 멘붕에 빠뜨린 카메라는 이후 100년이 되어서야 예술로 인정받는 매체가 되었다.
주로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리며 그림 연습을 하는 나는 회화와 사진의 상생을 체험하고 있는 중일 거다.
자신의 나체를 찍는 카메라를 향해 점점 도전적이 되어가는 세 장의 사진 속 여성작가, 늙어가는 자신의 몸을 적나라하게 찍어 배열해 놓은 남성 작가, 갓 출산한 아기를 안은 엄마의 두 다리 사이로 흐르는 핏자국까지 사진은 정말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실주의' 표현 매체다.
사진도 포토샵이란 기술이 발달되어 점차 사실이 왜곡되거나 작가의 의도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나 내용이 연출 가능해지니 예술가들의 도구로써 최상인 듯하다. 이렇게 예술을 표현할 수 있는 매체들이 다양해진 오늘날 동시대의 미술인 현대미술은 얼마나 복잡해지고 그 폭이 넓혀져 왔는지가 충분히 이해됐다. 그러니 중요한 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 중, 그림과 글쓰기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더 잘하고 싶어 욕심을 부렸나 싶다. 그걸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던 전시회였다...
2017년 '서울 올림픽 미술관(Seoul Olympic Museum of Art : 소마)'에서 전시됐던 테이트 누드전을 관람하고 난 후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