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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May 04. 2020

바이러스가 (나한테) 쏘아 올린  맥시멀리즘

이번 생에 미니멀리즘은 아무래도 글렀나 보다.

 몇 년 전부터 전 세계를 매료시킨 미니멀리즘의 발원지는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잦은 지진에 대비해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물건만 소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생활방식이 그네들의 ZEN 스러운 철학과 맞물려 매력적인 삶의 가치관으로 탄생한 듯하다. #미니멀리즘의 해쉬태그를 단 이미지들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특히나 내게 미니멀리즘을 동경하게 만드는 공간은 부엌이다.   


 어느 칼럼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한국음식의 다양함과 깊은 맛에 매료된 어느 외국인 요리사가 어느 한식의 대가의 부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과연 대가의 부엌에는 어떤 장비와 물건들이 있을까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그곳에는 불, 칼, 도마가 전부였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오만가지 장비 빨을 세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나를 비웃는 듯한 아주 쿨한 일화였고 사진은 없었지만 볕이 잘 드는 환한 부엌에 썰렁할 정도로 텅 빈 카운터탑, 오래 사용해서 길이 잘 든 두터운 나무 도마와 날이 잘 서 있는 명품 칼 한 자루가 놓여 있는 고즈넉한 부엌을 상상하게 했다. 나도 그런 쿨한 부엌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 깨끗한 부엌에 있으면 없던 손맛도 날 것 같은 것은 나만의 착각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대가의 부엌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나는 예전부터 주방 소형 가전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이뿐만인가. 가전제품은 아니지만 자잘한 잡화 수집에도 일가견이 있다. 이를테면 밤껍질까는 가위, 붕어빵, 호두과자 틀, 호떡 누르개, 파 채칼, 수란 만드는 틀 등등, 한국에 살 때도 지하철 안에서 중소기업 아이디어 박람회 출품작이라며 판매하는 물건은 몇 개씩 사서 주변에 나눠주곤 했었다.


 내 집을 방문한 지인들은 정말 없는 게 없구나라는 긍정적인 말부터 물건이 지나치게 많아서 어수선하다는 양가 어머님들의 빈축까지 모두 내가 별의별 살림살이가 많다는 것에 동의한다. 가뜩이나 정리정돈에 소질이 없는데 물건까지 많으니 내 부엌은 항상 어수선하다. 나는 왜 이리 부엌 장비들을 사들이는 것일까?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다.


 나의 장비 욕심의 근원은 아마도 도구의 힘을 빌어 나의 게으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미식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그러나 팍팍한 살림살이와 미니멀리즘이라는 시대적 사조에 의해 나의 장비 욕심은 한동안 봉인이 되어 있었다. 미니멀 부엌이라는 태그를 지닌 아름다운 사진들은 나의 어수선한 부엌을 비웃는 것만 같았고 현재 있는 거나 잘 쓰자를 넘어서서 일 년 동안 한 번도 안 쓰거나 만져봐서 설레지 않는 물건은 당장에라도 버려야 할 것 같은 조바심마저 생겼다.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져 밖에 나갈 수 없는 위기의 상황, 재난 영화에서 생존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어떻게든 목숨 걸고 가려는 곳이 있다. 바로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슈퍼마켓이다. 그곳에는 음식도, 응급처치 약품도, 양초도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곡물과 육류의 폭발적인 수요 증대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제한 인원만 마트 안에 입장시키고, 식료품을 사기 위해 2m간격으로 늘어서 있는 행렬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SF 재난영화에 나오는 상황이 전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동네 슈퍼마켓을 내 집 냉장고같이 여기며 항상 텅 빈 냉장고를 지향하려고 했는데, 스스로 인내심 부족한 ADHD 인이라 확신하는 나는 마트 앞에서 줄 서기가 너무나 괴롭다. 예전처럼 마트를 버젓이 드나들 수 있는 시절이 참으로 그립다. 때문에 한번 장을 보면 최소 일주일은 아쉬움이 없도록 대용량으로 식자재를 구입해야 한다. 그마저도 내가 원하는 품목이 구하기 힘들어지거나 가격이 뛰는 불상사도 많이 겪는다. 이제 자급자족의 욕구와 더불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의 호기심과 실험정신을 발휘하는데 제대로 멍석이 깔렸다.


 그래서일까? 그동안 천덕꾸러기같이 못나 보이던 나의 '장비'들이 이제야 든든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빵기, 에스프레소 머신, 주서기, 바이타믹스, 인스턴트 팟, 파니니 그릴, 푸드 프로세서, 에어 프라이어, 식품 건조기 등등... 이 딴 거 없이도 남들은 나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같이 보여 주눅이 들었던 나의 장비덕심(?)은 봉인해제가 되었다. 요즘 북미에서는 밀가루와 이스트의 품귀현상과 더불어 제빵기도 품절사태가 빚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찌감찌 제빵기를 이용했던 나는 왠지 모를 자부심마저 느꼈다.


 내가 어느 소형가전 하나에 꽂히게 되는 과정은 대게 영감 얻기-필요성 자각-검색의 과정을 거친다.  

내 집이 카페요, 정육점이요, 식당이니 이를 말미함지 않고는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집콕 복음 1장 1절의 말씀에 따라 내가 새롭게 들인 장비는 미트 슬라이서(MEAT SLICER)이다. 이것은 덩어리 고기를 불고기나 샤부샤부 등에 쓰일 수 있는 두께로 공정이 가능하다. 가격도 물론 같은 부위여도 덩어리 고기가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식비도 절약할 수 있다. 고기뿐만 아니라 햄이나 치즈도 덩어리로 사면 훨씬 저렴한데 원하는 두께로 슬라이싱이 가능하다.


 고작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한 조각을 사기 위한 스타벅스 DRIVE-THROUGH의 (내 눈에는) 엄청나게 긴 행렬은 나로 하여금 우유 거품기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가끔은 우유 거품이 봉긋하게 솟은 스페셜티 음료가 당길 때를 대비해서이다. 추운 겨울밤에 마시멜로를 띄운 핫초코로 공부하는 아이들을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이웃을 보호하기 위해 집콕 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나의 소비욕구는 활활 타오르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미처 다 죽지 않은 불씨 하나가 서서히 발화 중이다. 그러나 나의 맥시멀리즘은 미니멀리즘만큼이나 쉽지 않다. 한정된 예산, 제한된 공간이라는 벽이 있기 때문에 어떤 물건을 들이기 전까지 나만의 체크리스트에 부합하는 물건인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연장 구입 전의 나의 점검사항이란,


가성비가 좋은가

보관에 용이한가

세척 등의 관리가 수월한가

이 장비가 장기간으로 봤을 때 시간과 물질을 절약해주는가

삶의 질이 향상되는가


정도이다. 일례로 그동안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후보들은 파스타 머신 (국수는 그냥 사자), 레스토랑급 피자를 굽게 해 준다는 피자 스톤(관리가 힘들 것 같아서), 식탁에 앉아서 샤부샤부나 찌개 등을 보글보글 끓이면서 먹을 수 있게 해주는 전기 전골냄비(부르스타로 대체) 등등이다. 그리고 현재 엄격한 자체 심사를 통과하여 배송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놈들은 요리용 토치(불맛 내기), 미트 그라인더 (감히 순대나 소시지를 만들어 볼까 한다)가 있다.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가격의 압박과 자리 차지 때문에 엄두를 못 내는 물건은 키친에이드 스탠드 믹서이다. 그놈은 나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동기부여와 더 큰 부엌을 꿈꾸게 하는 장본인이다.

 

 물론 사놓고 후회하는 품목도 있다. 나한테는 현재 식품건조기가 그러한데 그놈도 이제 밋 슬라이서가 왔으니 홈메이드 육포로 조만간 진가를 발휘할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오늘 쓰다가 고장 나면 내일 당장 주문해야 하는 열 일 템은 제빵기와 와플기, 에스프레소 머신이다.  

 이처럼 살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보통 몇십 개의 아마존 리뷰를 읽고 내적 갈등을 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없이 사는 미니멀리즘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나의 선택적 맥시멀리즘을 합리화하기로 했다.


 애써 외면하는 것도 있지만 나는 다행히도 그릇 욕심은 없다. 모든 관심이 심미성보다는 기능성에 쏠려 있다고나 할까. 지금 쓰고 있는 그릇도 시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20년도 더 된, 깨지지 않는 아름다운 그릇이다. 대형가전은 관심 밖이라서 스토브니 세탁기 등은 전주인이 쓰던 백색가전이지만 고장 날 때까지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이왕에 조금 더 앓는 소리를 해보자면,

미용실은 일 년에 한두 번 가고 옷도 잘 사지 않는다. 직장 생활하면서 점심은 거의 매일 도시락을 싼다. 외식 횟수도 현저하게 줄인 데다가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해 모든 레스토랑이 문을 닫으면서 집밥만이 살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이용하는 배달어플은 내 스마트폰에 설치조차 안되어있다. 식탐은 강한데 입은 짧은 난해한 식구들의 삼시 세 끼는 오로지 게으르고 굼뜬 내 손에 달려있다.



  그리고 단순히 연장을 구입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어떤 아이템을 떠올리고 그것이 가져다 줄 작은 행복을 상상하는 것부터 나는 그런 '구입 전의 내적 갈등'을 무척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수많은 장비를 멋지게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넓은 공간과 풍부한 예산이 있어서 원하는 것을 아무 고민 없이 살 수 있었다면 장비를 들이는 일이 이토록 재밌지 않았을 것이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으나, 아무 사연도 없는 사이코가 묻지 마 살인을 하는 미국식 호러 영화보다 깊은 속사정이 있고 정교한 플롯에 의해 치밀하게 희생자를 고르는 스릴러가 훨씬 흥미롭듯이 즐거운 고민 끝에 내 손에 들어온 연장은 좀처럼 구입을 후회하는 일이 없다.

    

 정리의 대가 곤도 마리에 양이 우리 집에 방문한다면 자질구레한 살림살이에 아마도 기겁을 할 것이다. 2주 동안 집에만 있어도 부족함이 없는 자급자족의 환경을 갖추고 나는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나는 전생에 일 못한다고 맞아 죽은 수라간 상궁이었는데 지금 내 부엌은 지루하고 힘든 공간이 아니라 그나마 장비의 도움으로 억지 흥미라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그래서 내 장비들은 만져 보면 다 설렌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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