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난 러시안블루 상식이다

상식이 가라사대

by 최국환

2) 난 러시안블루 상식이다.


가을날, 그것도 겨울을 닮아가는 계절에 평소 꿈꾸던 일탈逸脫을 실현하기 위해 가출을 시도한 내 이름은 ‘상식’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몰) 상식이라고 불리는 두 살 된 수컷 고양이다. 군에 복무하는 주인아들 녀석이 지은 이름인데 정말로 무식하게 이름 앞에 ‘몰’이란 성까지 붙여주며 실컷 웃던 녀석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한 치욕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엄마, 우리 부대에 ‘김 상식’이란 선임 놈이 있는데 기본상식도 없고 무식하게 졸개들을 괴롭히는 꼴이 꼭 이놈 닮았다 크크.”

보성 어디쯤에서 태어나 이 집으로 오기 전까지 많은 상처를 받았었다. 아비의 얼굴은 물론이고 엄마를 익히기도 전, 형제들과 헤어져 이리로 저리로 불려 다녔다. 그 사이 지낸 고물화물차의 좁은 공간과 무지막지한 기계음은 지금껏 마음의 공포로 자리 잡아 좁은 공간과 차 소리만 듣더라도 지레 겁을 먹고 까무러칠 정도니 어찌 보면 주인아들 녀석 눈엔 정말 몰상식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러시안 블루’, 비록 어이없는 녀석에게 이름이 지어졌을지언정 나는 나름 족보 있는 고양이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시골 보일러공장에서 태어난 게 무슨 죄라도 된단 말인가?

삼 개월이 안 된 어린 나를 주인부부는 서슴지 않고 받아들였다. 어디 마땅히 버릴 곳을 찾던 그런 비참한 사정에서 그야말로 구세주를 만난 셈이었다. 고장 난 보일러를 수리하기 위해 들린 집, 집수리를 마치고 막 떠날 차에 고양이 울음소리가 그들에게 들렸고 사정을 채 듣기도 전, 그들 손엔 이미 내가 안겨있었다.

심한 상처를 입고 시골로 내려온 주인부부의 인상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차려지는 식사도 예전 공장에서 봐왔던 것들과 달리 나름 정갈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진수성찬이었다. 비록 고장 난 허리를 가진 바깥주인의 행동은 느렸지만 나의 심술궂은 몽니 한방에 생선통조림 뚜껑은 신속하게 열렸고 느긋하게 미소 짓는 나의 마음은 그네의 고장 난 허리쯤 그다지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뿐인가, 안주인의 보살핌은 자식처럼 나를 아끼려 하는지, 혹은 시골의 적막함에 대한 보상을 내게서 얻을 요량인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하루 종일 품 안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런 대접을 받고 있어야 할 내가 지금 요 모양 요 꼴이 되리라고는 가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마실을 나온 김에 세상도 한번 둘러보고 기왕지사 나온 길,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이웃집 길고양이를 비롯해 툭하면 우리 집구석구석을 훔치는 몇몇 녀석들에게 훈계도 할 겸 잠시 떠난 길이었단 말이다.

keyword
월, 수, 금, 일 연재
이전 01화의도된 가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