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이 가라사대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서 길을 찾기로 했다. 평상시 그저 주인이 건네는 밥을 먹고, 그네들의 손에서 자식 같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오늘의 가출은 어찌 보면 다소 무리였다는 게 사실이다. 간간이 허락되는 외출에서 얻었던 경험도 이 순간에는 다 소용없는 일들이었다. 급한 건 잔디가 푸르게 깔려있는 내가 살던 포근한 집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 쯤이면 아마 주인 부부의 걱정도 말이 아닐 것이다. 혼나는 건 둘째치고 급한 대로 집을 찾아 처량한 울음으로 용서를 빌기로 작정을 했다. 어렴풋이 길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내음이 코를 자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어둠 속에서 점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차츰 거리를 좁히더니 조심스러운 떨림으로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길고양이가 틀림없었다. 태어나 형제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격은 후 처음 경험한 지근거리의 대면이었다. 두발은 당장에 얼어붙었고 심장마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조심스레 말을 걸어봤다.
“혹시 거기 누구 있니?”
대답이 없었다. 대답은 고사하고 긴장으로 빛나던 눈동자 밑에 또 다른 작은 눈망울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리곤 점차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너는 잔디밭 하얀 집에 사는 고양이 아니니?”
도리어 상대편이 붙여오는 질문에 눈이 번쩍 뜨이고 왠지 반가운 마음에 서슴지 않고 대답을 던져주었다.
“맞아, 나 그 집 고양이야 그 집에 사는 상식이야.”
“너희들 나를 알아보는구나.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니?”
대답대신 거리를 좁혀오는 녀석들의 발걸음은 좀 전의 긴장이라도 풀린 듯 빨라지고 있었다.
“아니! 너희들은 우리 집에 가끔 찾아오는 청사, 초롱 아니니?”
“맞아 창밖에서만 봤던 그 집 고양이구나.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시간, 이런 데서…….”
뜻밖이었다. 가끔씩 내가 살던 마당을 찾던 녀석들을 이리 만나다니, 한편으론 반가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언젠가 마주치면 따지고 넘어가리라 다짐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녀석들로 말하자면 동네 길고양이로 살며 종종 슬픈 목소리로 주인부부를 유혹해 아까운 나의 식량을 거덜 내는 못난 놈들이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나면 따져볼 참이었지만 오늘은 내가 처한 처지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관계로 모든 걸 꾹 참으며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
“우선 반갑다. 그런데 너희들은 무슨 일로 깊은 새벽에 외출을 한 거니.”
“혹시 우리 집에 가서 아침식사라도 할 요량이니?”
이 두 녀석이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가출의 ‘가’자도 꺼내지 않은 채 슬쩍 마음을 떠보았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
그중 어른스러워 보이는 녀석 청사는 마치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냥 말꼬리를 흐렸다.
청사, 초롱, 내 이름에 비하면 무척이나 어여쁜 이름이었다. 한 달 전쯤 되었을까! 창밖을 통해 집 마당을 서성이던 바짝 곯은 녀석들이 눈에 밟힐 즈음 이들을 불쌍히 여긴 안주인의 배려로 녀석들의 식사가 챙겨지고 있었다.
차츰 횟수가 늘어나더니 두 녀석의 몰골도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다.
“쟤네들 모자지간 인가 봐.”
“내 생각도 그런데 어린애가 일찍도 새끼를 낳았나 보네 불쌍한데 이름이라도 지어주자. 눈망울이 땡글땡글 밝은데 엄마는 청사, 아이는 초롱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한 달 전에 있었던 주인의 대화가 얼핏 떠올랐다.
"혹시 꼬마 녀석이 네 자식이니? “
대답대신 청사는 꼬마 녀석을 품에 꼭 안으며 작은 눈물 하나를 달빛에 떨구고 있었다.
“맞아 나는 이제 한 살이 겨우 지났고 초롱이는 삼 개월이 채 안 된 내 딸이야.”
“사실은 젖은 고사하고 먹을 게 마땅치 않아서 초롱이 먹이려고 개구리를 찾아 나선 길이야.”
청사의 대답에는 그간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나와는 또 다른 사연과 고통이 묻어 있었다. 개구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가을을 벗어나기 위한 계절의 변화가 한참 전부터 일고 있었다. 푸르게 세상을 물들였던 온갖 풀들이 마르기 시작했고 주변을 가득 메웠던 개구리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전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몇 마디 거들었다.
“왜! 너희 집주인이 가끔 밥을 주지 않니?”
“그리고 우리 집엔 요즘 통 들리지 않던데.”
하긴 이들 모녀의 모습을 창을 통해 본 지도 한참이 지난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서러움에 북받친 청사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