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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리 Jul 26. 2023

온전한 사랑

면벽의 유령 - 안희연

8시 반 기상이 점점 9시가 되고. 칼같이 10시에 맞춰오던 내가 유연근무제라는 핑계로 20분씩 늦는다. 아이디어도 3-4개. 7개씩 내던 인턴 시절과 달라졌다. 몇 개 채택되었는가 문제가 아니다. 내 '태도'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5개는 내자. 초심을 잡자. 열심히 하자. 내게 당당해지자. 일을 미루고 놀러 갈 때의 찝찝함, 중압감, 스트레스. 덜 느껴도 되지 않을까. 아카이빙도 다시 시작했다. 인사이트에서, 새로운 관점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인사이트는 좋은데 키카피는 다시 써야 할 것 같아'. 이전이었으면 완벽하지 않았다 자책했겠지만, 요즘은 뿌듯하기만 하다.






한결같음은 어렵다. 나조차도 해이해지는데, 나무는 나무답게 꼿꼿하다. 졸린 눈을 부비며 책상에 앉을 시각, 나무에게서 카톡이 온다. 그는 날 사랑둥이라 부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호칭이다. '수요일이라 피로가 많이 쌓였겠지만 조금만 힘내고 금방 내 품으로 돌아와요.' 2년 넘도록 한결같은 애정을 준다.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고 싶었다. 학생인 나무는 돈이 부족했다. 혼자라도 가겠다며 마음먹었다. 어제, 밤 11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던 회의. 나무는 카톡 20개를 보냈다. 읽지도 못한 나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쏟아부었다. '보고 싶어서 벌써 설레.' '야리랑 잘 놀고 있으니 마음 편히 와요.' 순간, 그 없이는 어떤 것도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여행도, 제주도 여행도, 부산/경주 여행도.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날이 스쳐갔다. 그와 모든 걸 함께 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우린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둘이여만 하니까. 그래도, 나무 곁에 있고 싶다.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다.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 아이를 낳고 싶다.



10대, 20대 초반의 난 성공만을 보고 달렸다. 좋은 대학, 좋은 회사, 높은 연봉, 높은 평판, 높은 사회적 지위. 요즘은 아이를 키우는 일도 행복할 것 같다. 나무와 손 잡고 걷기만 해도 기분 좋으니까. 야리와 나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있다면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목숨 걸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무와 야리와 아이들과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 일을 위해 평생을 바칠 건 아니니까. 내 일이 좋다. 성취감을 느낀다.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일.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경중을 따진다면, 나는 무엇을 걸어도 나무를 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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