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롭다
어제는 Labor Day라 월요일임에도 회사를 가지 않았다. 이번주부터 토요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관계로 그도 나도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싫은 소리를 별로 하지 않는 그도 꼭 토요일에 일을 가야 하냐며 몇 번이고 툴툴거렸던 걸 생각하면 정말 마음에 안 들었구나 싶다. 일요일에 다시 그의 집으로 출발해 친구들을 불렀다. 고기를 잔뜩 사 바베큐 파티를 하기로 했다. 세 번째 보는 그의 친구들이라 나도 마음이 한결 편했다.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려는데 그가 기도를 하자 했다.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하는데 딱 영화에서 보던 장면 같았다.
끝에 앉은 나는 다른 끝에 앉은 사람과 손을 맞잡아야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가 You have to complete the circle! 하는 바람에 웃음을 참으며 친구와 손을 잡았다. 전도사인 친구가 부끄러웠는지 한국어로 기도를 해 알아듣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서로의 안전과 건강을 기원하며 짧게 올린 기도가 지금도 마음에 깊이 남아 있다. 낯선 땅, 캐리어 두 개와 고양이 두 마리를 데리고 혼자 공항에 도착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그가 애정하는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주말이 참 따뜻했다.
거실에 불을 다 끄고 공포영화를 보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TV 앞에 모여 앉았다. 제일 무서운 걸 고르자며 예고편만 5편은 봤다. 겁먹어 중간에 보다 말았으면서 곡성을 다시 보자는 그의 제안을 계속 묵살하고(나는 세번째다) 서로가 안 본 영화를 찾다 넷플릭스에 있는 '주'를 보았다. 무서워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별로 안 무섭다며 허풍을 떨던 친구도 나중엔 베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걸 생각하니 아직도 웃음이 난다.
두 번째 영화는 Descent였다. 너무 졸린 나머지 시작과 동시에 잠이 들어 영화가 끝난 줄도 모르고 숙면을 취했고 자정이 넘는 시각 자고 가라는 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너무 덥다며 친구들이 자리를 떴다.
월요일은 오후 2시에 일어나 먹다 남은 고기를 구웠다. 그의 형과 함께하는 식사자리는 어제처럼 따뜻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었는데도 재밌었다. 그와 함께하면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른다. 정신 차려보니 오후 9시라 디저트를 먹으러 밖을 나섰다. 그는 파란색 바닐라 아이스크림, 나는 갈색 초코 아이스크림. 둘 다 치아 색이 변한 것이 웃겼다.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와 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벽 3시. 5시에 기상해 출근해야 하는 나는 그냥 밤을 새울까도 생각했지만 어느새 곤히 잠들었다.
특별히 어디 나가지 않고도 그의 품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 것이 몽글몽글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독일어, 한국어, 프랑스어로 얘기하거나 그에게 스페인어를 배운 것이 좋았다. 별로 못한다고 엄살을 부리지만 나는 그가 자신에 대한 기준이 참 높은 걸 알고 있다. 저녁을 사준 그에게 Gracias Amor 말하니 보조개가 깊게 파이도록 웃었다. 나는 그의 모든 점이 좋지만, 깊은 눈과 보조개를 특별히 사랑한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잘 굽히지 않는 편이고 안 되는 건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된다. 나도 내 가치관이 뚜렷한 편이라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많다. 한국 교육 시스템이 좋다며(와본 적도 없으면서) 아이를 한국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말에 무슨 소리냐며 미국에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티격태격하던 일. 별것도 아닌 일로 투닥거리지만 그는 정말 논리적인 사람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대부분 내가 굽히게 된다.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그와 보내는 시간은 항상 행복하다.
"I cannot promise you eternity, but I promise I won't hurt you in any way."
그는 You'd better stay, because here is where you belong이라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