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작가 Mar 05. 2021

사실은 말야, 너를 만나기 전에(2)

점점 진해지는 임신테스트기를 남편에게 짠 하고 보여주고 싶어 설레는 마음에 테스트기를 사용했는데 희미하던 두 줄이 갑자기 이렇게 선명한 한 줄이 될 수가 있나? 괜히 임신테스트기에 배신감이 느껴지면서 기분이 나빠지고, 기분이 나쁘면서도 갑자기 주눅이 드는 듯하다. 이전에 희미한 두 줄의 테스트기와 비교를 해봐도 이젠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 5분도 기다려보고 10분도 기다려봤는데 아무리 봐도 선명한 한 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집이면서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휴지통에 갖다 버렸다. 한 줄의 그 테스트기만.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임신이 아닌 건가? 그럼 내가 이틀 동안 본 건 뭐지?' 많은 생각이 들면서 남편한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말하면 되는 건데 두 줄이 사라졌다고, 완전 단호한 한 줄 뿐이라고 입 밖으로 차마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머릿속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고, 틈틈이 휴지통 속에 있는 테스트기를 굳이 다시 꺼내 봤다가 넣어놨다가만 반복했다.



어제 선물 받은 꽃다발도 예쁘게 정리해놓고, 보라색 리본 끈도 침대 머리맡에 예쁘게 달아놨는데 괜히 야속하게만 보인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은 오늘 일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몸은 괜찮은지를 물어본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남편의 말에 대답은 하면서 머릿속은 따로 놀고 있었다. 그러다 용기 내서 할 수 있었던 말은  '근데 아직 흐릿한 선이라 몰라.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어. 너무 기대하진 말자' 여기까지였다. 계속해서 아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남편에게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 아침이 되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한 줄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흐려서 아직 모르는 거라고 했잖아.'라고 말하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한 줄의 테스트기를 며칠 더 확인한 후에야 그 날이 시작되었고, 임신이 아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편도 적잖게 당황하긴 했지만 크게 실망한 기색을 보여주진 않아 덕분에 무거운 분위기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감정은 명백히 '상실감'이라는 감정이다. 상실감,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후의 느낌이나 감정 상태.

'아쉽다, 슬프다, 허무하다, 당황스럽다' 이런 감정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마음 상태였다.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종종 보긴 했지만 단순히 '속상했겠다'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었는데 속상하다는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겠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경우를 '화학적 유산' 또는 '화학적 임신'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대게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우린 임신 확인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두 줄에서 한 줄로 돼버린 테스트기를 알아채버린 경우다. 겪어보니 알았다. 이런 일은 흔한 일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위로가 되면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듯한 느낌. '유산'이라는 말도 거슬려서 '화학적 임신'이라고 의도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 첫 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우린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에는 보라색 꽃들만이 남아있었고, 희미한 두 줄을 확인했던 첫날은 야속하게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이전 06화 사실은 말야, 너를 만나기 전에(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