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oon 12월 호 연재 북 토크
매거진 Moon 12월 호 3화
모처럼 일찍 퇴근해서 집에 갔더니 첫째와 아내는 방에서 둘이서 무언지 할 말이 많다. 귀를 쫑긋 세워보니 수업시간, 시험, 어제 다녀온 미용실 등등 시시콜콜한 얘기가 끊이질 않는다. 둘째는 거실 탁자에서 문제집을 풀다가 막혔는지 엄마를 찾는다. 내가 좀 해줄까 슬쩍 끼어드니 엄마에게 물어보겠다며 포르르 언니 방으로 간다. 지난번에 맥없이 끼어들었다가 ‘이것도 이해 안 돼’ 한 소리 한 것이 화근이다. 순간 맥이 빠진다. 한편으로는 잘 됐다 좀 쉬어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이내 휑한 거실처럼 마음이 쓸쓸해진다. 하루면 괜찮은데 의도치 않은 소외가 몇 번 이어지다 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서재로 들어가 김소진을 찾아본다. 5년 전에 이사하면서 책장을 정리했는데... 그 뒤로 살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디에도 없다. <자전거 도둑>이 보이길래 반가워 뽑았더니 박완서 선생님 작품이다.
애들 키우면서 늘어난 전집 아동 도서들에게 자리를 내준 지 꽤 오래인데 내 마음의 책장에서도 흔적으로만 남고 말았나 보다.
'다 커서 어리광이네.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더 내 자리를 열심히 만들었어야 하는데 내 탓이야.' 하는데 이순원도 안 보이고 윤대녕도 안 보인다. 성석제는 <왕은 안녕하시다 1>만 보인다. 그들을 찾을 수 없는 작은 방안이 거실보다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누구를 가장 좋아해?" 하면 제일 첫머리에 두던 작가가 '김소진'이다. 요즘 사십 대 후반인 내 또래의 사람들이 교과서를 엮고, 문제집을 만들고, 모의고사를 출제하면서 ‘자전거 도둑’이 간간이 보인다. 성석제의 ‘오렌지맛 오렌지’를 문학 교과서에서 발견하고 뭉클했던 것이 교사 4년 차인가 5년 차인데... 김소진은 제법 늦은 감이 있다.
"아비의 서사"
‘아버지 같은 것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유년의 ‘나’가 ‘쐬주’를 예찬하는 아비가 되어가는, 지난날 보잘것없던 아비보다 더 자잘해져 버린 ‘나’를 읽는 일은 20대의 나에게 묘한 공감과 위로가 되어주었었다.
김소진은 나에게 <쥐잡기>, <자전거 도둑>으로 시작해서 <쐬주>에 와서 ‘손목이 풀린다’는 절정의 경지를 알려주고 마지막으로 <갈매나무를 찾아서>로 남아 있다. 학생들에게 '백석'을 가르칠 때마다 김소진에 대한 기억으로 머뭇거릴 때가 많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구절 밑에 밑줄을 치면서 머릿속으로는 김소진을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아쉽고 안타깝다. 김소진의 그다음을 기대하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우리네 아버지의 이야기, 그런 아버지를 이은 ‘나’ 그리고... 김소진이 묘사 해갈 오늘은. 이제 오늘과 내일의 이야기를 김소진은 어떻게 풀어갈까? 이런 나의 기대 앞에 작가의 안타까운 죽음은 참으로 곤혹스럽고 쓸쓸했다. 김광석을 잃은 이듬해였다. 김광석을 잃고 입대해서 김소진을 잃고 제대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후로 이어진 김영하, 백민석, 박민규에 얼른 마음을 내주지 못했었다.
김소진을 생각하면 치열함이 떠오른다. 말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치열함. 그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사전이 필요하다. 순우리말을 이처럼 많이 발굴하고 부려 쓴 작가도 없지 않을까? 인터넷도 지금과는 게임이 안되고, 핸드폰에 카메라도 없던 시절, 그의 책을 읽으며 그냥 그냥 넘긴 우리말 단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뜻이 짐작이 되긴 했다. 우리말이어서였을까? 아님 명문이기 때문이었을까? 몇 단어는 후에 다른 뜻임을 알고 띵했던 기억도 있지만, 괜한 한자어에 매달리지 않고 우리말로 문장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감탄하고 또 감탄하며 읽었었다.
이번 겨울은 김소진을 읽어야겠다. 그와 나의 아버지, 그와 내가 된 아버지를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아버지에 대해 깊게 깊게 되새김질을 해보아야겠다. 이제는 스마트한 전화도 있으니 덤벙덤벙 건너뛰던 우리말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겠지?
과거에 대한 집착? 아니다. 김광석을 다시 꺼내 드는 만큼 김소진도 다시 꺼내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잊히면 안 되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분명히 존재하니까. 그리고 우리 아이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짚어보고 내가 어느 지점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