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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루나무 Oct 29. 2020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니까

오늘은 펑펑 울기도 하고 식은땀이 나서 왜 이러지 싶기도 했다. 갑자기 오후에 아빠가 전화해서 내일 저녁 때 할머니가 온다고 했다. 그때부터 기분이 그리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춘기에 할머니 때문에 겪었던 성적 수치심을 느꼈던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울상이었다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결국 오열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식당을 했다. 아빠가 장남으로 태어난 탓에 나는 태어나자마자 장손녀가 되었고 시골에 자주 갔다. 어느 날, 온 가족이 모였다가 어른들이 놀다 오겠다며 사촌 동생들과 나와 동생까지 다 할머니에게 맡긴 채 나갔다. 여름이라 날이 더워서 놀다가 갑자기 할머니가 샤워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그곳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머무는 방을 비롯해 샤워실, 화장실까지 다 갖춰져 있었는데, 특히 샤워실에 크기가 꽤 커서 열 명이 들어가도 끄떡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여자애들 따로 남자애들 씻기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같이 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따로 안 하냐고 사촌 동생과 내가 물었더니 굳이 따로 할 필요가 있겠냐고 했다. 나는 속으로 ‘하기 싫은데 어떡하지’ 싶었고, 동생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안 할 거라고 해서 더 고민했다. 지금이야 거절을 잘 하지만 그때만 해도 거절을 못 해서 그저 웃으며 넘기는 것이 다였을 정도다. 결국 시간이 흘러 동생과 다른 사촌 동생 한 명만 빼고 다 같이 샤워실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샤워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샤워를 하면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너무 부끄럽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 그랬다.  


혹시나 싶어 막내 작은 아빠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할머니에게 이야기라도 해줄 거라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반대로 “그럴 수도 있지. 할머니가 손자 손녀 씻겨주지도 못해?”라고 했다. 그 순간 괜히 말했다 싶었다. 한 줄기 빛처럼 믿고 있던 마음마저 과자가 부서지듯 파스스 부서졌다. 어른에 대한 신뢰가, 엄마 아빠에게 관심 밖이라 여겨졌던 느낌보다 더 심하게 사라졌다. 믿고 있던 가족에게조차 신뢰 받지 못하는데 이제는 믿을 사람 하나 없구나 생각했고, 그때부터 나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편은 아무도 없다고 굳게 믿었다. 남자라는 존재 그 자체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 기억은 내게서 사라졌다. 아니 너무 바쁜 나머지 잊고 살았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2017년에 번역 학원에 갔을 때 명절에 시골에 가지 않기 시작하면서 그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다시 악몽을 꿨고 가슴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그 전부터도 할머니를 싫어한다고 말했지만 그 기억이 생각 난 후로 더 싫어하게 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를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왜 안 가냐고 묻더니 별로 흥미가 없다고, 그냥 가기 싫다고 했다(이것도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다. 가라고 해서 간 것뿐이다). 나는 그러면 당연히 알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고 했다. 솔직히 그러거나 말거나 할 말이 많았는데, 이 말을 듣고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어이가 없고 화도 나고 손녀에게 그게 할 말인가 싶었다. 아무리 서운해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할 말이 많지만 두 가지만 말하겠다. 그래서 나는 명절에 가지 않는다. 얼굴도 보기 싫고 친척들도 가면 취업이나 결혼 이야기만 꺼낸다. 20대 초반부터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지금도 진절머리가 난다. 차라리 가지 않는 것이 나를 지키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전보다 나아지고 아무리 모습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내가 받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앞으로도 갈 생각이 없다. 물론 그 며칠은 조금 외롭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여태 그렇게 살았으니 앞으로도 나를 지키며 살 것이다. 그게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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