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루나무 May 29. 2022

추억이 아닌 고통, 그 끝은 어디에

그날도 어김없이 전날 잔업까지 해서 열세 시간 일하고 아침부터 나왔다. 원래는 프라이팬 틀을 만드는 곳에 근무해야 하는데, 거기에 일이 별로 없어서 프라이팬을 누르는 프레스 작업에 동원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잔업이 계속되다 보니 너무 졸렸다. 그럴 만도 한 게 솔직히 하루 여덟 시간만 근무하고 쉬는 것도 아니고 잔업까지 하는데 누가 피곤하지 않겠는가. 저녁 열 시가 되어야 집에 도착해 겨우 씻고 자고 새벽 여섯 시가 넘어서 나가는 일상은 무언가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에 동원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보통은 서서 일하는데 여기는 앉아서 일하는 곳이었다. 웬일로 편하게 일하나 싶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프레스에 눌릴 수도 있다고 한다. 조심하려고 애를 썼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졸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나를 깨워주시기도 했다. 그만큼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 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졸고 있던 사이 저절로 왼손 엄지손가락이 프레스 밑에 놓였고 흰 장갑 사이로 뭔가 붉은 액체가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걸 옆에 있던 분에게 보여주니 나를 바로 반장님에게 데려갔다. 큰일이 났다고 하면서. 장갑을 여는 순간 피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내 몸속에 있던 피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프레스의 무게가 60에서 70kg 정도 되니까 엄청난 무게에 눌려버린 것이다. 바로 병원에 가기로 하고 일하시던 분 중 한 분과 함께 병원에 가기 위해 차를 탔다. 


그때부터였다, 여태 겪어보지 못했던 통증이 시작된 것은. 정말 신에게 빌고 빌었다. 내가 너무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차를 타고 가는 50분 동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만큼 통증의 정도가 이거 하나 때문에 온몸이 아프다고 느꼈다. 원래 몸은 다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가 아프면 전체가 다 아픈 거 아닌가. 그런 만큼 이 통증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잘못해서 다친 거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병원에 도착해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그런데 보통 수술을 하게 되면 마취를 하는데 여기는 마취도 해주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 마취를 해줘야 아프지 않은데 왜 해주지 않는단 말인가. 진짜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수술을 하지 않으면 손을 못 쓸 수도 있으니 그냥 수술했다. 이때도 정말 너무 아팠다.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너무 아팠다. 눈물이 계속 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픈데 욕을 할 수는 없으니 소리를 냈다. 얼마나 아프던지 지금도 기억한다. 무섭고 죽을 만큼 아픈 그 상황을 어떻게 잊겠는가.


수술은 이러했다. 일단 손가락을 다쳤으니 있던 손톱을 다 빼냈다. 그리고 그 위에 달걀 껍질에 붙어 있는 투명한 물체를 올렸다. 수술은 간단했지만 나는 너무나 큰 아픔에 소리를 있는 대로 막 질렀다. 울면서 빨리 끝내달라고 소리쳤다. 수술이 끝나고 크게 부은 손가락에 붕대를 감아줬다. 치료가 다 끝나고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 말로는 결코 예전처럼 손이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며, 손가락에 있는 자국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없어질 것이고 모양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힘줄 앞에서 다쳐서 손은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정말이지 이 손으로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이제 스물한 살인데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해서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됐을까 생각했다.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는 일하다 다쳤을 뿐이고 피해자일 뿐이니까. 같이 갔던 분이 같이 밥을 먹자며 중국집을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셨다. 그리고 집에 데려다주셨다. 


다음 날 회사에 갔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들이 나를 위해 하루 동안 파업을 하셨다고 했다. 내가 다쳐서 병원을 간 사이에 왜 어린 애를 일을 많이 시켰냐고 다들 난리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장님이 나를 찾아왔다. 무릎을 꿇고 내게 사과를 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자기도 예전에 손을 다쳤지만 일하느라 치료를 받지 못해서 결국 손가락이 회복되지 못해 잘 쓰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리기도 하고 여자라서 얼른 치료를 받게 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며 내 잘못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리가 나만 다친 게 아니라 두 분이나 더 다쳐서 쉴 만큼 위험한 자리였다고 한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그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회사에서는 나보고 산재보험을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친 건 내 잘못이기도 하고 이게 엄마 아빠에게 알려지면 걱정할 게 뻔한데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시간 동안 계속 안 하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다쳐서 어차피 일도 바로 못 하니 방법이 딱히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산재보험을 하기로 했다. 회사에는 불이익이 가겠지만 내가 살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후 근로복지공단에서 오라는 전화를 받고 찾아가니 어떤 아주머니가 자기가 담당자라며 나를 반겨줬다. 도와주겠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도 어떤 말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몇 달 동안 그것 때문에 몇 차례를 공단에 가서 이야기를 듣고 계속 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나는 장해 등급을 판정받았다. 거의 끝인 14등급이었고 보험금이 500만 원가량이 나왔다. 하지만 이 돈은 전부 내 손을 치료하기 위해 쓰였다. 이걸 받으면서도 내가 이거 받으려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고생했나 싶었다. 그리고 그 지옥 같던 주방에 일을 다니면서도 공단에 다녔다. 그 정도로 시간이 길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내 손 같지만 사실 7년이 지났을 때만 해도 내 손 같지 않았다. 꼭 두 손 사이에 제3의 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에는 손가락에 물이 차서 동상에 걸리기도 했고 조금만 많이 움직여도 손가락이 너무 아파서 손을 계속 잡고 있어야 했다. 지금도 이 손은 다친 흉터가 남아 있으며 음료수 캔을 따거나 계산서 위에 있는 철을 잡지도 못한다. 다시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내게는 이 아픔이 추억이 아닌 고통으로 자리 잡았다.

이전 05화 폭풍전야, 고요한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