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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루나무 May 21. 2022

폭풍전야, 고요한 시간

주방 일을 하기 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일을 했었다. 생계 때문에 계속 쉴 수가 없었다. 돈을 벌지 않으면 누가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에 13시간씩 근무하는 한 프라이팬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잔업이 없는 줄 알았다. 듣기로는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근무하고 바쁘면 잔업이 있다고 했지, 꼭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첫날 원래 퇴근 시간이던 6시가 되기 전에 나에게 물었다. “혹시 잔업 할래?” “오늘 잔업 있다던데 하고 가.” 돈이 궁했기에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했다. 


자는 시간은 고작 5시간. 7시에 차를 타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어서 새벽 1시 넘어 자서 아침 5시가 넘어 일어났다. 매일 계속되는 일상에 지치기도 하고 너무 피곤해서 쓰러져 자는 날이 많았다. 매일 새벽부터 나가 밤 늦게 들어와 얼굴만 겨우 씻고 잠을 청하기 바빴다. 내 시간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돈을 벌어야만 살 수 있는 이 삶을 끝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죽을 수 있는 것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일만 하는데 과연 그럴 시간이 있을까. 장담하건대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이 삶이 지독하게 싫었다.


일하는 곳에서도 계속 맡은 일이 달라졌다. 어느 날은 손잡이를 놓는 작업을 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프라이팬 밑바닥을 누르는 프레스 작업에 동원되었다. 일이 없으면 다른 곳에 일이 없는지 물어보고 그 일에 즉시 투입되었다. 잘 몰라도 물어봐 가면서 계속 해야 했다. 힘들었지만 그나마 할 만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일하는데 할 만했다고 하면 뭔가 궁금하겠지만 역시 사람들이 좋았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아주머니나 아저씨들과 같이 일했다. 그분들은 가정도 있고 나 같은 자식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매번 쉬는 시간마다 음식을 나눠주시며 같이 먹자고도 하고 커피도 한 잔씩 하면서 노동의 설움을 달랬다.


너무 일찍 출근해서 아침도 못 먹고 가다 보니 늘 배고픔에 힘들었는데 덕분에 조금은 덜었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늘 말을 걸어주셨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버텼을지 지금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그분들의 도움이 정말 컸다. 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에게 일을 맡겨준 것도 감사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사흘 하다 잘려서 자신감도 떨어지고 아르바이트를 6개월째 구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알려준 곳에서 일을 겨우 했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돈과 사람들이 나보고 무조건 일해야 한다고 등을 떠밀어서 했다. 하지만 막상 하고 나니 사람들이 좋아서 계속할 수 있었다. 야근도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이 끝나면 집에 가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었다. 공장이 바쁘니 무조건 하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돈을 더 주기도 하고 사람들과 정을 더 쌓을 수 있었다. 그런 점이 좋아서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고 한 달이 되고 석 달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거기 있는 시간이 즐겁게 느껴졌다. 같이 일하시던 분은 나를 자기 손녀처럼 생각해 주셨다. 스물한 살의 어린 내가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이 나이면 알바는 둘째치고 공부하러 가야 하는데 그럴 시간에 일이나 하고 있으니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한 건 아니지만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이 처지가 가여웠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좋고 일도 익숙해지니 할 만해져서 그나마 수월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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