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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Oct 11. 2017

자존감을 높이는 언어습관 3가지 방법

언어습관은 타인을 위하기 전에 먼저 나를 위해서 필요하다.

이 글이 실려 있는 에세이 책 -브런치를 통해 출판제안 받음

«사람아, 너의 꽃말은 외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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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어떤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필자가 깨달은 바 꽤 유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참고만 하시라.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자아존중감의 준말이다. 자아존중감이란? 자아 개념의 평가적인 측면으로 자신의 가치에 대한 판단과 그러한 판단과 관련된 감정(출처: 심리학 용어사전).


쉽게 말해, 우리가 이해하는 자존감의 정의는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를 높이는 언어습관 3가지를 살펴보려 한다. 여기에서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행동이 자동화되는 과정으로 언어습관이라는 의미를 규정하다.

자존감을 높이는 언어습관 3가지
첫째, 감사합니다-는 많이 할수록 좋으나
죄송합니다-는 그렇지 않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이상한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숙제를 해오지 않거나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체벌을 받으며 이렇게 하라는 거였다. '엉엉..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엉엉..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를 반복하며 울면서 싹싹 빌라고 한' 것이다. 순진했던 나는 평소에는 멀쩡하게 지내다가 체벌받는 상황이 올 때마다 선생이 하라는 그대로 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했으니까. 그렇게까지 바보같이 착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곧 상대에게 굴복하고 나를 잃을 수 있다는 위험을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죄송합니다-하고 비는 행동)이 중학교 때까지 이어지자 아이들의 놀림은 물론, 당시 체벌했던 선생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무조건 '죄송하다'라고 빌라는 태도에 대한 관념적 이해가 매우 부족했던 거다. 그저 무조건 죄송해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했으니 '죄송'이라는 태도와 '눈물'을 그때그때 연기했다. 체벌이 끝나면 뚝 그쳤다. 그 당시 나를 지금 내가 본다면 아마 소름이 돋지 않을까 할 정도의 메쏘드 연기였다고 자평해본다.


선생이 체벌을 결심했다면 잘못을 한 나에게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 무엇을 고쳐서 새롭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이 체벌의 본질인데, 어린 나를 무시한, 실로 무식한 선생의 처사였다.


나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할 때마다 죄인 코스프레를 하며 진짜 죄인처럼 살아야만 했다. 나에게 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심각한 것은 이 언어습관이 나 개인만 죄인으로 만든 게 아니라, 나에게 학교라는 공간을 초중고 내내 감옥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벌써 20년은 더 된 이야기인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때 선생으로부터 '죄송'이 아닌 '감사'의 태도를 배웠다면 지나온 내 삶이 좀 더 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스승의 날에 찾아가는 선생님으로 기억되었을 수도.


좋은 스승이나 상사는 나의 잘못에 대해 나무라지, 나에 대해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잘못입니다-가 아니라, 어떤 잘못을 했으니 고치겠다-가 되어야 한다. 혹시라도 내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에게서는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다.


죄송합니다-(혹은 미안하다)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 버릇을 20대 중후반까지도 좀처럼 고치지 못했다. 예의상 죄송합니다-라는 말이라도 차라리 '실례합니다' '양해바랍니다' '송구합니다' 라고 할 수 있으면 대체하고, 그것을 '감사합니다'나 '고맙습니다'로 할 수 있으면 대체하는 게 좋겠다.


죄송합니다-를 줄이라는 말이 곧 잘못을 인정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정말 잘못을 인정해야 할 때, 적에 쓰자는 거다. 날 만만하게 보고 ‘죄송’이라는 태도를 악용하는 이들에 빌미를 주지 말라는 것. 요즘은 '자존감'에 대한 언급이 흔해져서 이런 언어습관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미안(죄송)합니다-의 버릇을 절제하자는 게 이 글의 핵심이다. 더 나아가 긍정의 온도를 느끼는 언어습관은 세 번째에 다루기로 하자.

첫 번째의 결론. 습관성 '미안'으로 죄인을 자처하지 말자는 거다. 미안해-라는 말이 순간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꼼수?)에 불과한 거 아니냐는 여자친구의 오해는 이를 직감적으로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둘째, 핵심 전제는 '공감'이다.
비판이든 동조든 마찬가지.


두 번째는 나를 포함해 타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꼽아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닌가? 혹여나 상대의 마음을 한 번에 얻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권장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초반엔 상대에 대해 합리적 의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싶다. 순진하게 누굴 마음 놓고 믿을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대화의 단계가 있다면, 그 첫 번째가 바로 정서적 교감(라포 형성)을 하기 위해 서로를 오픈하기 전, 스몰토크 속 가벼운 조크로 긴장을 푸는 게(아이스 브레이킹-이) 아닐까 한다. 생각보다 실없는 농담이 긴장을 적절하게 녹이고 마음을 열게 하는 효과가 있는 걸 필자는 깨달았다. 상대가 유머나 조크를 수용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경계는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나 역시 이 사람에게서 본전을 뽑겠다는(뭔가 내게 이익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 우선되는) 자세가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고, 동시에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공감 말이다.


대화 상대에 관련한 사안이나 상황, 사태가 당장 직접적으로 심각하지 않는 한, 처음은 가벼운 농담으로 아이스 브레이킹 해보자. 혹은 상대가 맘껏 자랑할 수 있도록 초반에 판을 깔아주는 것도 좋겠다. 상담 이론 같은 걸 굳이 들이밀지 않더라도 실제 적용 가능한 사례를 인물로 들어 소개하려 한다. 딴지그룹 총수 '김어준'씨다.


그는 참 재미있는 인터뷰어이자, 능수능란한 방송 진행자이다. 일반인에게는 직설적이면서도 특유의 위트로 적절히 감싸주는 대화법을 쓰는데 반해, 능구렁이 같은 정치인들을 상대할 때는 들었다 놨다 쥐락펴락하는 그의 방송 진행 솜씨를 보노라면 어느새 팬이 되어 버릴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히고 만다. 문득 그의 공개석상에서의 언어습관이 궁금했다. 그가 했던 과거의 방송을 쭉 들어보았다. 요즘엔 다시 듣기를 무료로 편하게 할 수 있는 '팟캐스트'라는 게 있으니까(유튜브도 있다).

(그런데 다스는 누구 겁니까?)

그는 초반에 가벼운 조크를 던지고 함께 웃으며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상대의 최근 실적(?)이나 대표되는 이력을 툭 던져서 직접 입을 열게 한 다음 긴장을 풀어준다.

이어서 내가 또 한 번 감명 깊었던 것은 그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태도였다. 꼭 상대에게 자유 발언권을 준다는 점.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한 게 있다면?' 이라거나 '마지막으로 듣는 분들께, 혹은 특정 인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하고 허심탄회하게 말하라는 거다. 그런 후 최대한 개입 없이 가만히 들어준다. 하나의 인터뷰 스킬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에게 이입하여 동조•비판•경청한다는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진행자 김어준 씨는 공감능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 공감이 되지 않더라도 공감하려는 그 자세(혹은 페르소나)가 진심보다 중요한 태도다. 몇 년 전 방송부터 요즘 하는 방송까지 한결같은 그의 태도가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단지 '스킬'로 때운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위선은 그에게서 비치지 않는다. 다만 동의든 비판이든 상대의 입장에 이입하는 과정이 있다는 점, 상식이 있는 상대라면 이를 고스란히 전달받기 때문에 그와의 대화에서 심각한 갈등으로 찝찝하게 마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언쟁이 아니라, 사안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거다. (진보적인 기준이 누구보다 확고한 그가 반대 진영 패널의 논리를 잠자코 듣고 있을 때 오히려 흥미롭다.)


그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방송이든, 누군가든, 어떤 힘 있는 권력이든, 시스템이든 특별히 그걸로 덕 볼 생각이 없다. 눈치도 봐야 되고,  비위도 맞춰줘야 하고, 자기 검열을 해야 하지 않나. 거꾸로 내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서 (내 매력을 알아보고) 좋아할 사람들은 좋아해 주고, 싫어하는 사람은 엄청 싫어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라고 말한 바 있다. 김어준 씨는 비교 우위에서 얻는 자신감이 아닌 자신을 객관화해서 인정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줄 아는 자존감이 분명한 사람이다. 상대방을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태도인 사람에겐 호감을 느낄 것이고, 아닌 사람에겐 나름의 처지를 존중은 하되 호감은 그리 느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은 김어준 씨의 말.

가능하면 있는 거 드러내세요.
자기가 부족하면 채우면 되지.
없는 거 있는 척하다 망하는 거거든
있는 그대로 드러내세요.
그걸 알아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당신의 매력을 퍼뜨릴 거야


잠깐 공감의 객체를 '상대'가 아닌 '나'로 돌아와 보자. 생각 없는 아무 말 대잔치가 아닌 한, 나 자신이 한마디의 문장을 막연하게 고를 때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영향을 (끼치는 동시에) 받기 마련이다. 글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첫 번째 독자가 나 자신이지 않은가?


이 글은 글쓰기와 말하기를 '언어습관'으로 묶어서 전제로 삼았다. 만약 욕이 나오면 이 욕이 나오는 나의 내면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언어습관에 있어서 '공감'이란, 나 자신과의 공감은 기본이니까. 수시로 들여다보자. 누군가는 이를 마음수련의 한 가지 방법으로  ‘알아차림’이라는 말로써 강조한다. 내가 어떤 언어를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감정으로 분출하는 찰나, 알아차림으로 통제 혹은 적절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인생에서 나 자신조차 나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평소에 나에 대한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대화- 즉, 왜?라는 질문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순서로 보면 그 이후가 타인이다. 상대에게도 '이입'이 선행되어야 함이 핵심 전제가 된다. 이러한 이입은 '이해'와 함께, '상대 입장에서의 관점'을 가져보는 것부터 출발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고, 진심 어린 동조가 가능할 테니까. 상대와 나눌 주제나 내용에 집중하기 전에 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면 이입은 자연스럽다. 나와 동등한 관점, 대등한 관계에서 출발하는 거다.


이는 '감정'이입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이 사람이 지금 어떤 사정이 있는 상황-입장(처지)에서 '생각'을 할지도 가늠해볼 여지가 있다. 아까 언급한 김어준 씨는 이것이 꽤나 탁월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이러한 태도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자세이기 때문에, 상대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시발점이 된다.


특히 제삼자의 청중이 있는 인터뷰에서는 그 사람다운 말과 글, 그 사람이 소속되었거나 그 사람이 처한 상황(입장)을 존중하는 태도로 이입하고 질문에 임할 때 청중이 바른 가치 판단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OOO당 소속 당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실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OOO에 대해서는 이런 비판도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는 식이다. 손석희 앵커가 가끔 “판단은 시청자분들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 역시 이 같은 맥락과 닿아있다고 본다.


 덧붙이자면, 어차피 상대는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스스로의 깨달음이 없는 한, 내가 타인을 바꾸지는 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사람 대 사람의 '존중'이라는 태도이다. 자존감은 이 존중받는 느낌에서 일어나는 법이니까. 보편적 상황에서는 내가 내 삶의 주체이듯 그 역시도 자기 삶의 주체인 것을 인정하고 대해야 한다. 상대의 주체를 무시한 채 나와 동일시하거나 대상화하려는 순간 문제는 어김없이 발생한다. 동의가 없는 행위는 배려나 사랑의 얼굴(가면)을 하고서 자칫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폭력일 수 있단 걸 자각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 대우받을 수 있다는 옛 현인의 말씀을 되새겨본다.



셋째, 긍정의 온도를 가진 언어를
꾸준히 연습하고 사용하자.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심리학의 거장 아들러의 말이다. 그 인간관계의 긍•부정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다시 언어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생기는 본질은 역시 '기대'라는 측면에서 발발하는데, 그것은 곧 ‘내 그럴 줄 알았다’와 같은 류의 실망감을 내포하는 언어습관을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럴 거면 허튼 기대를 말아야지. 누가 누굴 평가하나?

이렇듯 우리의 인식은 사실과 늘 일치하지만은 않는다. 그걸 헷갈리는 순간 관계는 반드시 틀어지게 되어 있는 법. 인식의 틀을 과감히 깨거나, 혹은 적극 활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인식하는 만큼의 언어습관을 형성하며 산다.


어렸을 때만 언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한참 먹고서도 언어 공부는 필요하다. 온도가 맞지 않으면 바꿀 수 있는 말이 있다.

대화에서 가장 좋은 건 상대가 듣고 싶은 말(혹은 비언어)을 적절히 해주는 거다. 꼭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들어도 좋은 말이라면 괜찮다. 그것이 '부정'이나 '비관'이길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나 문장을 직접 노트에 '밝음(긍정)' '중간(중립)' '어두움(부정)' 등으로 구별해 적어 보면 좀 더 객관적으로 나의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언어습관까지) 언어습관을 알 수 있다. 수시 녹음과 메모가 기록의 방법으로 탁월하다. 좀 더 긍정에 가까운 말을 자주 구사하는 노력이 처음엔 의식적으로라도 필요하다. 좋지 않은 습관을 고치는 좋은 법 중 하나가 새로운 습관으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습관이 형성되는 데는 뇌가 꾸준함에 익숙하기까지 21일이 걸리고, 행동이 자동화되기까진 평균 66일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이는 역시 꾸준한 연습이 곧 자존감을 높이는 언어습관을 형성한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겠다.


우리는 말하는 대로 성장한다(매 순간 부끄러움을 확인해가면서). 나의 말과 글이 상대와 자신의 자존감에 영향을 준다는데, 언어습관을 어찌 소홀히 지나칠 수 있을까.(글_이동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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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수정판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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