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해 요즘 사람들은 '나'라는 자신을 잘 모른다. 왜 알아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나는 평생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 한다. 눈 감는 순간까지 모든 행위의 주체이기도 하다.
'나'
가만히 있어도 외부의 시선에 너무 쉽게 노출되어 타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환경에 우린 놓여있다. 나 자신에 집중할 수가 없으니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SNS가 '눈'이라는 오타로 바뀌는 건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SNS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타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해결 방법이 있다면 아무쪼록 타자를 벗어나거나 무시하거나 극복하거나 셋 중 하나다.
Persona 페르소나 : 타인에게 보이는 가면을 쓴 내 인격(자아)
나는 첫 번째인 '벗어나기'를 택했다. 대신 가난도 함께 택한 셈이 되었다. 혼자선 자본을 축적할 수 없으니 껄끄러운 타자라도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다. 타협하는 순간에 나를 더 생각하는 것이 '벗어나기'다.
자발적 가난이 아니라면 대책없이 어리석게 살 순 없는 노릇. 적절한 타협이 필요하다. 단, 나를 속이지만 말자.
두 번째, '무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상처가 누적되기 때문이다. 개인이 지속하기에 매우 버거운 방법이다. 피드백이 중요하다는 이유도 있다. 나를 객관화하고 정신적 성숙을 꾀하기 위해선 무조건적인 외면은 곤란하다.
마지막으로 '극복하기' 는 곧 이겨낸다는 의미인 동시에 '짊어지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벗어나는 것'과 '무시'가 외면이라면, 여기서 '극복'은 받아들임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세상은 너무도 쉽게 '극복하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하고 싶은 걸 선택하라'라고 떠들어대지만 늘 버거운 현실 앞에 무너지곤 한다. 이럴수록 더욱 집중해야 하는 것이 '나'라는 철학적 인식이다. 타자에 기준을 삼고 집중하면 외부의 환경 탓, 남 탓만 하고 상처는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올 뿐이다.
앞서 나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나와 대화를 하려면 먼저 나를 만나야 한다. 내가 나라고 해서 매일 만나고 있다는 건 '착각'이다. 그냥 스치는 수준이다.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운명이라 했던가? 나와 나는 인연에서 그쳐선 안 된다. 공동운명체이다. '나'와 나를 말하니까 마치 다중인격을 말하는 듯 하지만 정확하게는 내면의 나를 직면하는 걸 가리킨다.
문제는 타인에게 파악되는 자아(페르소나)가 나의 민낯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오히려 타자는 맞닥뜨리는 게 익숙해져서 상처마저 무뎌지기도 하는데, 내가 나에게 간혹 실수로 주게 되는 작은 상처는 너무 낯설어서 크게만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라고 대화를 청하고서 남북정상이 만나듯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나 자신과 만나는 방법'이 필요했다.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나 자신과 만나는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1. 바라봄 2. 물어봄 3. 돌아봄
1. 바라봄은 조급함, 조바심을 거둔 채 결핍이 있는 나 그대로를 바라보고 자존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특히 성장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방어기제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삶을 지속시키기도 한다.
바라봄이란 지켜봐 준다는 의미도 있다. '실수 하나 안 하나 지켜보겠어!'가 아니라,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런 나 자신이 있구나. 좋구나. 하는 거다. 바라봄 뒤에 돌아봄과 물어봄이 뒤따르는 이유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렇지 않으면 아주 작은 실수라 해도 너무 큰 오류를 범하게 될지 모른다.
나를 바라보는 방법은 육신으로만 따지면 전신 거울을 봐야만 한다. 아니면 타자를 통해서 보는 방법이 있겠다. 문제는 타인에게 파악되는 자아(페르소나)가 나의 민낯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가장 정확한 동시에 반복할 수 있는 나 자신과 만나는 방법. '전신 거울'과 같은 '타자의 시선'에 이입해 자신의 페르소나를 객관화한 전제에서 바라보기, 맨 얼굴의 나를 물음으로 좇아가보기, 냉정하게 돌아보기가 아닐까? 글쓰기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발견할 수도 있다.(다음에 포스팅 하겠다)
가끔 내가 나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때는 CCTV가 있다고 가정해보고 그 앵글 속에 나를 관찰하는 상상을 해보자. 처음엔 견딜 수 없이 부끄러울지도 모른다. 내 민낯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2. 물어봄은 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기이다.
- 화두를 던지고, 왜? 이런 현상이 있는지 깊게 파고들어 본질적 원인을 분석하고 제거하거나 혹은 제대로 이해해서 해결한다. 이건 훈련이 필요하다. 끝까지 파고드는 끈기도 있어야 한다. 최면을 레드썬(?) 걸고 풀어주지(깨어나지) 못하면 더 심각해질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진짜 최면을 걸라는 건 아니다. 최면 없이도 맨 얼굴을 직면하는 건 어색할뿐 가능한 작업이다. 차근차근 조바심 따윈 거두고 나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관심이 생기고, 자꾸 신경이 쓰이고 보고 싶고 그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새삼 궁금하지 않나?
'나'를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냥 관심을 가지는 순서부터 밟아보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계속 질문하자. 가장 정확하게, 나 자신을 속이지 말고.
3. 돌아봄은 반성과 복기하기, 알아차림을 말한다.
일기를 쓰는 사람, 매일 자기의 감정이나 일상, 혹은 오답노트처럼 자기성찰을 기록하는 사람이 잘할 수 있다. 명상하는 방법도 많은 전문가들이 추천한다.
또한 내가 어떤 감정을 발현하는 그 순간의 스스로 알아차림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정신수양, 마음 닦기, 고해성사, 회개하기와 같은 종교적 의식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거기까진 꼭 가지 않아도 된다. 결국엔 나에게 집중하여 나에게 수렴되고 나에게 귀결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좋겠다.
불현듯 어떤 과거의 사건이 떠올라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나는 그만큼 성숙했으니 다행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