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이 든다'는 말은 순우리말이다. 나무들이 제철이 되면 잎을 내고 꽃을 피우듯이 '철이 드는 때가 있다'는어원을 품었다. 철이 든 사람은 꽃을 피운다. 고유한 향기를 내고 저마다 열매를 맺는다.
철이 들면 이렇듯 점점 자연과 가까워지기에 계절의 변화도 잘 느낀다. 하루하루 시간의 변화도 함께 느낀다. 짧은 '순간'에 휩쓸려 매몰되기보다 긴 시기의 '기간'을 두고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유영해 흘러간다. 주변의 사소한 변화에 감탄하고 감동하며 감사할 수 있다면 '철이 들었다'라고 말해도 좋다.
2. 변화에 민감하기에 인간 사이에서도 지혜로운 공감능력을 발휘한다. 내 이야기만 내세우기보다 상대의 이야기에 더 시간을 내고 귀 기울인다. 상대의 가면 속에 감춰진 고통이 오롯이 느껴지면 말없이 듣고 토닥여준다. 민낯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며 자신의 기운을 나눠준다. 곁에서 온기로 지켜준다.
철이 든 사람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자신은 고통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그 고통을 겪는 개별의 사연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그렇다.
3. <중용> 14장에는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사유사호군자 실저정곡 반구저기신)이라는 공자 말씀이 나온다. "활쏘기는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 화살이 과녁의 정곡을 맞히지 못했다면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서 원인을 구한다."
나는 요즘 합리화를 절제하고 객관화를 의식하는 연습을 수시로 한다. 자신을 스스로 들여다보는 일은 세상에 내 색깔을 내기 위한 첫 번째 과정에 있다.
이는 세상에서 내가 남들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도록 돕는다. 결핍과 상처, 낮은 자존감이나 우울감 같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게 단단한 나를 인정하는 필수 과정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여유가 생기고 '내 탓'으로 귀결하는 아름다운 마무리 짓기가 가능하다. 숱한 실패 앞에서도 무너짐 없이 새로운 시작을 거듭하고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 나의 기준과 원칙이 생겨나면 철이 든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영원히 철들기 싫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그건 다른 개념의 철듦을 정의했기에 그랬다. 세상에 순응하고 나를 잊어버린 채 차려진 규정에만 날 부품처럼 잘 끼워 맞춘다는 의미의 철듦이었다.
이젠 내 정의가 달라졌다. 사전적 의미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줄 알게 되다’인데, 나름의 의미를 가져야 진짜 철이 든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철이 든다는 건 계절의 변화를 투명하게 느끼며 꽃을 바라보는 여유였다. 물기 어린 공기나 고즈넉한 노을을 한참이나 느껴보고 온몸으로 그리움의 시를 쓰는 인간이 되는 거였다. 이것은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나와 내 주변(자연, 타자)을 가만히 떠올려 보는 참된 진리에 가까운 인간의 도리이다. 글_이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