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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Aug 11. 2023

나는 왜 친구가 없을까(에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OO 하지 않았으니까.

가, 친구가 둘 뿐인 이유를 알았다.


단지 MBTI가 'I'(멘털 에너지가 자기 안으로 집중되는 내향인) 성향이라서도 아니었고, 친구는 '많아봤자 소용없다'라 가치관을 스스로 정립했기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사회에서 학습된 거였다. 


곰곰이 생각하니 난 수다도 좋아하고 외로움도 잘 타며 인정과 관심받는 걸 평소 즐기는 성향이라, 친구가 많았으면 싶을 때가 오히려 잦은 사람이었다. 막상 가까운 사람이 생기면 간이고 쓸개고 다 퍼줄 듯이 베풀어서 '좋아 보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친구가 적은 지를 구체적으로 따지기 싫어서 그냥 '베프 몇 명이면 족하지 뭐.'하고 합리화하며 여태껏 살아왔을 뿐이다. 종종 친구라는 존재가 필요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하는 질문은 내게 처음부터 틀린 전제였다. 나에겐 한계를 깨는 게 먼저였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모르는 나를 제대로 아는 것부터가 순서였다말이.

친구가 적은 이유를 따지고 보니 내가 세상을 주체적으로 왕따 시키는 것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골방 아티스트라서 그런 것도 다 아니었다. 단지 내 문제는.


질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사람이 많을 줄로 안다. 나는 이걸 깨닫기까지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쉬운 말은 아닐 테지만, 최대한 쉽게 풀어보겠다.


질문은 관심을 기반으로 한다. 관심은 이른바 보편적인 안부멘트(날씨/컨디션 체크 등)와 더불어 소소한 관찰로부터 뻗어가는 즉흥성 멘트로 이어진다. 이는 다시 스몰토크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목적이 있을 때가 아니면 질문을 일절 하지 않다.


나에겐 2명의 베프가 있는데, 고등학교 동창으로 시작해 쭉 지내온 베프 말고, 사회(전 직장)에서 처음 만나 수년간 베프로 지내는 친구가 내게 해준 말이다.

"친구니까 목적이 없이 우리는 만나잖아. 그 수년 동안 한 번도 넌 나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어. 오늘도 마찬가지로."

돌이켜 보았다. 친구를 만난 당일에도 그 흔한 '오래 기다렸냐'든가 '머리 했네'라든가, '밥 먹었냐'라든가 하는 질문을 난 하나도 건네지 않았다. 질문하지 않 내가 익숙한(거의 포기한) 친구 쪽에서 늘 배려하며 먼저 질문 없는 선 답변을 해왔던 거다.


그전에도 인간관계에 문제를 느낀단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친구가 이 말을 해준 적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친구는 옳은 소리를 하더라도 나에게 강요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내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그냥 매번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적확하게 말해주는 편이다. 난 그걸 객관화해서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건 네 생각이고'도 무조건적으로 일관하 성장을 꾀하기 어렵다. 살다 보면 생각의 틀을 깰 시기도 필요하다. 최근엔 내가 '변해야겠다, 바뀌어야겠다, 나를 깨야겠다'라고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같은 말이 무겁게 내 안에 쿵 하고 들어왔다.

인왕산 카페에서 커피를 먹다 말고 너무 세게 현실 자각 임(현타)이 찾아와서 한동안 멍했다. 목적이 있는 관계, 즉 강의나 계약을 앞둔 미팅을 하거나 몽글몽글 느낌이 통한 이성과 썸을 타거나 할 때에는 곧잘 질문을 던지는데 반해, 목적 없이 만나는 관계에선 질문을 하지 않는 내 과거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버지 입원했다 퇴원했어 등의 흔한 집안의 대소사를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야 알았던 이유)


왜 그랬을까?


 나는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 배려할 의식이 없었을까.


귀찮아서. 번거로워서. 에너지를 쓰기 싫어서. 사실 이게 거의 전부다. 결핍? 상처? 있겠지만 노력하지 않은 건 내 탓이다. 두려워하기만 하고 용기가 없다면 좋은 기회가 와도 새로운 국면을 전환할 여지를 잃고 만다.


미움받을 용기까진 다소 부족해괜찮다. 그 책 제목이 크게 히트 친 이면에는 대부분 미움받을 용기를 내어 살기가 어려우니까 반응한 것이다. 인사할 용기만큼의 질문할 용기면 충분하다. 거기에 신경 끄기가 아닌 '신경 쓰기의 기술'이 첨가되면 금상첨화다. 선 넘는 오지랖까진 말고. 상황 파악을 해서 적당히 관심 갖고 질문하 묵묵히 배려하면 '다정'하고 '스'한 호감상으로 자연히 남게 된다. 혼자서 감정 차올라 함부로 결론 내지 말고 질문하고 상황 파악하는 센스 기르기. 이게 관계 맺기 소양인 사회성의 기본이다.

인간관계와 내 세계를 확장하고자 한다면, 미래를 다르게 구축하고 싶다면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멋대로 규정한 자의식을 깨부숴야 한다.


그저께는 이런 일도 있었다. 군산에서 처음 알게 된 대표님과 수년 만에 서울에서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했다. 같은 공간에서  회사 대표(이하 대표님)이야기 중이던 어떤 작가 분(이하 작가님)을 예상치 못 채 함께 자리했다. 이번에 대표님과는 처음부터 서로에게 인사이트를 얻기 위한 짧은 코칭을 갖는 만남의 목적이 있었다면 새로 알게 된 작가님은 일정에 없던 만남이라 비목적성이 강한 상황이었다.


아마 평소 같았다면 침묵이나 내 답변만 계속되었을 시간이지만 용기를 내어 스몰토크부터 시작해 먼저 다가가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내 습성이 어디 가질 않아서 내 말의 비중을 조절하는데 살짝 실패한 감이 있지만 그마저도 일방적인 내 할 말이라기보다 상대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하려 노력했다. 신경을 크게 쓴 것이다.


또한 내가 관심을 기울여서 소소한 이야기도 중간중간 질문을 통해 이어나갔다. 내 모습이 스스로 어색했지만 누구나 나에게 더 많이 질문하고 관심 가져야 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생각부터 버려야 했다.


마치 평소 질문에 능숙한 사람인 듯 메소드 연기처럼 사회적 가면을 쓰고 물음표를 이어 나갔다. 관심을 기울이고 질문을 던지는 건 다 진심에서 우러났지만, 스스로 어색한 나머지 더 여유로 체했다.

최소한 내 콘텐츠(공간·작품·노하우 중 하나라도)가 있고 사람이 잘 웃고 긍정적이며 유머러스하고 질문도 관심을 기반으로 할 줄 알고 묵묵하게 소소한 배려까지 하는 다정함이 보이는 호감형이라면 내가 혼자 있고 싶다 해도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 찾아낸다. 불러낸다.

내가 정말 질문을 안 하고 살았던 사람이구나라고 깨닫고 나서는 내가 쓴 책마저도 가짜로 느껴졌다. 친구가 이 책은 내 껍데기로 쓴 책 같다며 솔직한 비평을 하면 '네 생각은 그렇구나' 정도로 치부했을 평소와는 다르게 받아들이게 됐다.



책에선 소통을 운운하고 질문을 주창하는 내가 정작 비목적인 상황에선 일방이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살고 싶다. 이게 맞는 거 같다'를 엮어 낸 책이라고 하면 거짓은 아닌 정도랄까. 이제 누굴 만나도 내 책을 선뜻 권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누군가를 내가 만날 때마다 또 무엇을 반복해서 하지 않았을까. 맞다. 마주치는 게 가장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할 말(답변)만을 고르기에 그랬던 것 같다. 매번 내가 무슨 말을 해줄까 가 늘 먼저였지 무슨 말을 들을까 혹은 물을까는 내 잠재의식 속에 없었다. 이건 철학의 문제이고 개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강의나 계약을 위한 미팅은 명확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질문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던 것이니, 내가 질문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얼마나 이기적인 처사였던가.


아마도 언젠가 질문을 무심코 던졌다가 된통 당했다던지(?) 상처를 받았다던지 했던 과거가 쌓여서 지금의 질문하지 않는 이동영이 된 건 아닐까. 친구나 내 사람으로 만들 줄 모르는 이동영이 된 게 아닐까. 스스로 가여우면서 동시에 못 됐다는 생각만 든다. 방어기제의 발현이 아니었다면 나조차 나를 설명하기 어려운 캐릭터란 생각이다. 그나마 이 정도 버티며 살아있는 게 용하다. 드디어 크게 와닿아서 깨달았다며 멍하게 시선을 잃어버린 나에게 베프는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

 '나는 특수케이스야. 사람들이 나처럼 이해할 거란 생각을 하고 대하면 친구가 생길 일은 없어. 작가니까 사람들이 네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을 텐데 그만큼 실망도 컸을 거란 말이지. 네가 진짜로 예의 없는 무개념 인간은 아니라서 난 종종 연락하는 거지. 질문 하나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해서 곁에 친구로 두겠냐?'

맞는 말이었다. 내가 자기애가 강하다던가 이기적이라던가 하는 말을 들을 때도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그만이지 하고 유야무야 왔는데. 질문하기는 타인에게 관심과 배려를 보인간관계의 기본 소양이었음을 다시금 온몸으로 깨달았다.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 관심을 기반으로 한 질문은 기본 중의 기본 조건이었단 걸 알곤 목적이 있으면 질문하는 계산적인 캐릭터가 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난 내가 세상 순수한 인간이라 세상이 불순하여 모든 게 안 맞는다고 착각해 왔다.

나를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 좋다. 근데 대부분 자발적 아싸가 아닌 한 친구가 없는 경우는 나만 사랑하고 남은 사랑할 생각이 없는 경우다. 그게 나였다. 돈이나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전쟁통에도 사랑과 우정은 피어난다니깐. 그래, 이건 내가 바뀔 문제였다.

나는 '친구'를 정의할 때 느슨한 관계까지 함부로 범주에 넣는 걸 경계해 왔다. 부모님이 서로의 존재를 알 정도는 되어야 친구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렇다. 이것도 깨야 한다. 꼭 특별한 친구나 절친만 친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술친구이거나 친하거나 좋거나 그냥 동네 친구도 다 친구이며, 지인이나 이름·얼굴 정도만 알아도 우정을 가질 순 있다는 허용범위의 개념을 새로 탑재할 필요가 있다. 

진짜 사회생활을 위한 얕은 관계에서는 '팩트' 위주로만 짧은 대화를 나눠도 충분하다. 피곤하게 모두에게 다 매번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출처_유튜브 캡처: 박언니의 다른 생활(책 '프렌즈' 리뷰 편)

하지만 내가 그래서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남에게 관심이 없어서 친구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점점 끼리끼리만 만나는 경향을 보인다. 나는 새로운 분야에 새로운 성향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내 세계를 확장해가고자 한다. 나 역시 그들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누구든 나는 환영한다. 내게 사기 치려는 의도만 아니라면 친구관계를 기꺼이 맺고 싶다. 소통이란 타인의 순수한 의도를 믿는 것에서 시작하니까.

질문이 필요 없는 상황도 있다. 흔한 일상 속 장면이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알아서 먼저 물을 따라 건네고 빠르게 수저를 세팅하고 분위기에 맞춰 슬쩍 메뉴를 권하는 일. 난 연애경험도 있고 조직경험까지 있음에도 불과 몇 년 전까지 이걸 안 하고 혼자 멍하니 받고만 있었다. 과거 회식자리에서 술잔이 빈 상사 옆자리에 내가 앉아 있어도 단 한 번도 술을 따라준 적이 없었다. 서열상 막내였을 때도 고기를 나서서 굽는 법이 없었고 비가 올 때 연인에게 선뜻 우산을 씌워주는 것보다 같이 좀 맞고 말지 이 정도 빗줄기엔 우산 귀찮아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걸 글로 옮겨 보니 나 정말 심각했던 사람이었네. 단순히 조직에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눈치껏 관찰하며 센스 있게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 인간이었네. 떠나지 않고 내 곁에 있어준 가족과 몇 안 되는 친구에게 평생 감사해야겠다...


모든 걸 외면한 채 과거 나처럼 함께하는 자리에서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는 사람은 단순히 상황파악이 안 되고 개념·예의가 없는 문제가 아니다. 상황과 사람에 관심이 없는 문제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건 이기적인 사람으로 평생 혼자 살다 갈 사람이라면 무한반복해도 무관한 문제다. 난 그런 캐릭터야 하면서 살 게 아니라 이걸 인지하고 이제라도 자각했다면 실천하면서 바꿔 나가면 된다.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배려를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질문도 없는데 배려도 센스도 없는 날 있는 그대로 봐주며 곁에 머물 사람은 세상에 없다. 가족과 베프 2명은 하늘이 보낸 귀인이다. 내가 친구가 없는 이유는 오직 나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대작 예술품이 나온 게 아니라면 이제라도 사회성을 길러야 하겠다.


너무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래도 난 글쟁이니까 쓴다. 한 번뿐인 인생에 얼마나 감추고 위선만 떨며 살까.


이 고백이 나는 물론이고 누군가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혹 나와 비슷한 사연이 있다면 좀 더 과감해지길 바란다. 날 인정하는 태도도 관심을 가지고 적당히 남을 배려하는 태도도.


이 글의 핵심은 관계에 얽매이라는 게 아니다. 필요성을 느끼는 데도 내가 관계에 한계를 느낄 때를 객관적으로 돌아보면 해답이 내려질 수 있다는 말이다. 새로운 만남은 싫지만 혼자서 외로움은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왕왕 있지 않나. 인생은 결국 혼자라는 말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친구가 없는 이유가 한계인지 선택인지는 객관화해봐야 한다.

인간관계, 새로운 관계 맺기는 피곤하고 부질없고 귀찮다는 말, 진심을 넘어 진실인가? 살펴보자.
가족 이외엔 믿을 사람 없어-맞는 말이지만 영속성이 있는 가족 하고도 갈등은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다. 갈등해소(화해) 방법과 이후 행동패턴에 따라 관계의 지속성이 또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가족 말곤 아니 가족도 거의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는 힘들어서 나 혼자 행복하게 살 거야 라는 결론을 내린 이라면 나는 100% 존중하겠다. 다만 나랑은 관계 맺지 말자. 그런 이가 이 글을 클릭해 읽었다는 것이 살짝 의심스럽긴 하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엔 더 반박하지 않겠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타고난 본연의 외로움을 감당해 내는 건 인간의 숙명이지만 사회 속에서 부대껴 가며 어우러지는 것 역시 숙명이라면, 핑계나 변명·합리화를 뛰어 넘어서 이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 첫 번째 단계가 자기 객관화라고 나는 생각하여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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