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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이 Feb 09. 2020

나라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만드는 결정적 차이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좌) 대한민국 서울 전경, (우) 아프가니스탄 전경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성공한 국가로 평가받습니다. 70여 년 전 한국전쟁 당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이제는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입니다. GDP 기준으로 세계 10위의 규모를 자랑합니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자동차, 조선 등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나라로 변모하였습니다. 반면에 아프가니스탄은 외세의 침략, 내전, 쿠데타의 역사를 지나 마르크시스트 정권의 등장, 소련의 개입, 탈레반의 집권, 9·11 테러 이후 미국의 개입이 이뤄지는 혼란의 시기를 겪습니다. 2018년에는 이라크를 제치고 테러 관련 사망자가 가장 많은 나라 1위가 되는 불명예를 안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적으로 실패한 국가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GDP는 세계 111위입니다. 왜 우리나라와 아프가니스탄을 비교할까요? 출발선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1955년 8월 26일, 전쟁과 혼란 외에는 세계의 이목을 끌지 못하던 우리나라가 IMF/세계은행 58번째 회원국이 되면서 국제사회에 데뷔했다. 흥미롭게도 우리보다 한 달 앞선 7월 14일에 아프가니스탄이 57번째 회원국이 되었고, 두 나라는 나란히 그해 9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제10차 연차 총회에 참석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이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고 1960년에 시작한 우리보다 먼저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p.475

어떻게 보면 아프가니스탄은 우리나라보다 경제적 활동이 빨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나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경제정책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개방 경제 체제를 지향했습니다. 그리고 사적 소유권 보호와 계약 이행 가제를 통해 시장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사적 소유권을 바탕으로 생산성과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향상하고 노동(도시화, 여성의 사회참여), 저축, 기술 발전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경제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반면에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국가 중에서도 엄청나게 폐쇄적인 국가로 여성의 사회참여가 어렵고, 권력은 부정부패가 만연합니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을 지탱하는 건 아편 산업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 시장의 90퍼센트 이상을 점유했습니다. 개방과 폐쇄의 경제정책의 차이가 지금의 큰 차이를 만든 것이죠.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책 표지

어떤 나라가 왜 그러한 경제정책을 펼쳤는지 유재수의 <세계를 이끈 경제 대통령들>에서는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결정을 가장 후회했다고 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재무 장관 시절에 왜 후회할만한 금본위제로 돌아가려는 결정을 하였는지 <세계를 이끈 경제 대통령들>에서는 당시의 역사와 정치를 배경까지 흥미롭게 소개합니다.


경제 대국인 미국의 경제 기틀을 마련한 알렉산더 해밀턴, 윈스턴 처질을 비롯한 금본위제를 둘러싼 각국의 경제 대통령들의 정책, 경제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주룽지 외 신흥국의 경제 정책 담당자들까지. 18명의 경제 대통령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와 정치, 경제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지만 두 가지 주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와 아프가니스탄 사례처럼 같은 출발선에서 경제정책으로 인해 다른 결과를 나타낸 일화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 경제정책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두 번째로는, 경제 정책이 처음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고마웠던 정책을 소개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한 정책과 나중에는 성공한 정책의 차이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과정이 재밌었습니다.

같은 출발선에서 경제정책으로 인한 다른 결과

일본과 이집트

(좌) 일본의 도쿄, (우) 이집트의 나일강

같은 출발선에서 경제정책으로 다른 결과를 보여준 나라는 일본과 이집트입니다. 일본은 GDP 기준 세계 3위로 경제 대국입니다. 이집트는 GDP가 세계 44위로 일본과 경제력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의 경제력 차이와는 다르게 1차 세계대전 전·후로 두 나라 모두 기회가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 세계는 처음으로 세계화를 경험합니다. 무역 장벽이 낮아지고, 교통과 통신이 급격히 발전하게 됩니다. 이로써 이집트는 유럽의 관심을 받습니다. 면화 생산기지로써 말이죠.

19세기 말 유럽은 면화의 수요가 엄청났습니다. 드레스와 침대 시트, 커튼처럼 일상용품이 대부분 면직물이었기 때문이죠. 영국에 주로 면화를 제공하던 미국에서 남북전쟁으로 면화 생산에 차질을 빚었습니다. 이에 이집트는 면화 생산국으로써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이집트는 면화 생산기지로 변화합니다.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한 이집트는 대규모 투자를 진행합니다. 이집트는 영국과 인도 간의 물동량이 증가하는 걸 감지하여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설립을 추진합니다. 대규모 프로젝트에 자금이 필요한 이집트는 유럽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유럽의 막대한 투자로 이집트는 엄청난 호황을 이뤄냅니다. 하지만 호황은 불황의 전조였을까요. 1907년 뉴욕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는 런던 등 전 세계 주식시장의 폭락을 가져왔고, 외부 자금에 의존하던 이집트는 휘청거렸습니다. 수에즈 운하처럼 무리한 투자를 진행하던 이스마엘 파샤(당시 이집트의 지도자)는 파산했습니다. 이집트는 뚜렷한 경제정책 없이 무력하게 쓰러졌습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많은 행운을 얻었습니다. 유럽이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이권을 챙긴 것이죠.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 많은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일본은 전쟁 전 영국, 프랑스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챙기던 이권을 이어받았고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느라 방기한 그들의 수출시장을 거저 손에 넣었다. 따라서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전쟁이 끝난 1919년에는 금 보유고가 무려 22억 엔으로 늘어났다. 아울러 러일전쟁 당시까지 수입에 의존했던 군사물자를 자체 생산하면서 중화학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1919년에는 전체 공업 생산액이 약 2배로 증가했으며, 공업구조도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중심이 옮겨졌다.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p.311

호황은 과열된 경제를 가져왔고 높은 인플레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정작 쌀값의 폭등으로 인해 서민의 삶은 오히려 어려워지고 있었죠. 이 시기에 1918년에 일본 최초로 하라 다카시가 이끄는 내각이 구성됩니다. 하라 다카시 내각에 대장 대신(일본의 재무대신)으로 복귀한 다카하시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놓여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시아 시장에 재진출 하는 것과 높은 인플레이션 해결이 필요했습니다. 어려운 일본 경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관동대지진과 쇼와 금융공황이 발생합니다. 이 시기에 다카하시는 금융공황의 책임을 지고 퇴진하게 되죠.

1차 세계대전 이후 불황을 겪는 동안 일본 정책사들은 금본위제로 복귀를 위해 엔화를 절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윈스턴 처질이 이끌던 영국이 금본위제로 회귀하면서 국제적인 압력은 더욱 커졌죠. 화폐가치가 올라가자 수출경쟁력이 악화되고 불황은 더 깊어집니다. 1931년 12월, 더 어려워진 일본 경제 상황에서 다카하시는 대장 대신으로 복귀합니다. 이 시기에 다카하시는 '일본의 케인스'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카하시는 대공황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본위제 탈퇴라는 환율정책, 저금리 정책인 통화정책 그리고 재정 지출의 확대를 동시에 구사하는 정책 조합을 선택한다. 다카하시는 취임 직후인 1931년 12월 13일 금본위제를 탈퇴하면서 곧바로 외환에 대한 통제를 실시했다. 아울러 엔화에 대해 약 40퍼센트의 평가절하를 실시하여 금본위제로 인한 디플레이션 압력에서 벗어났고 일본의 수출품에 대한 가격 경쟁력을 제고했다.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p.321
경제 운영에 있어서도 긴축재정에서 적자재정으로 기조가 180도 전환되었다. 1931년 중앙정부의 지출은 GNP 대비 10.7퍼센트에서 14.7퍼센트로 대폭 확대되었으며 약간의 흑자를 기록하던 재정은 GNP 대비 6.1퍼센트에 해당하는 대규모 적자로 반전되었다. 최근 많은 경제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다카하시의 정책 조합은 불황 탈출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p.322

당시에 케인스 이론이 정립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다카하시는 금본위제를 탈퇴하여 엔화를 절하하고 저금리 통화정책을 씁니다. 재정정책도 긴축에서 확장으로 전환하죠. 이는 일본이 불황을 벗어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일본에는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있었고, 이집트에는 경제를 이끄는 리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지금의 일본과 이집트를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네요. 생각해보면 2008년 금융위기를 대처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차이도 이와 같습니다. 불황에서 어떠한 정책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같은 출발선일지라도 다른 결과를 불러옵니다. 한 국가의 정책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습니다.

https://brunch.co.kr/@dongdong2/29

처음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고마웠던 정책

독일과 캐나다

(좌) 독일 프랑크푸르트, (우) 캐나다 밴쿠버

처음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재조명받은 정책이 있습니다. 독일과 캐나다에서 시행한 정책인데요. 두 나라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은 나라 이기도합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라인 강의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1990년 대에는 유럽의 병자라고 불릴 만큼 활력을 잃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저성장을 시작했으며, 200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경기가 침체되었습니다. 결국 2003년에는 제로성장을 하게 되었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재정 적자 폭은 커졌습니다. 독일이 어려움에 처한 원인은 통일의 후유증이었습니다. 서독과 동독의 마르크스 화를 일대일 교환 정책을 펼쳤던 것이죠. 동독 마르크스 화가 절상되면서 동독은 경쟁력을 잃고 경제는 침체되고 실업률은 증가하였습니다.

1998년에 슈뢰더 정권은 11퍼센트에 육박하는 실업률을 잡겠다는 포부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이에 슈뢰더는 '어젠다 2010'의 개혁안을 추진하게 됩니다. 어젠다 2010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슈뢰더는 '어젠다 2010'에서 기간제 노동계약이 가능하도록 하는 등 하르츠 위원회의 개혁안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더욱 확대했고 실업급여를 최장 32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했으며 장기 실업자에 대한 실업 급여와 사회부조를 통합함으로써 혜택을 줄이고 구직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도록 유도했다. 특히 기업의 해고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경제적인 이유'로 해고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혔다. 아울러 연금 및 의료보험 의무가입 대상자의 소득 수준을 인하함으로써 연금 및 의료보험 대상자를 확대하는 동시에 연금 및 의료보험 수입을 확충했다. 퇴직연금보험의 정년을 기존의 65세에서 상향 조정하여 2035년에는 67세가 되도록 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사업자들의 건강보험금 부담을 줄였다. 또한 기업 환경의 개선을 위해 개인소득세와 법인세를 인하했다. 마지막으로 수공업 부문의 창업을 장려하고 혁신이 촉진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했고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을 강화했다.
'어젠다 2010'은 독일의 기존 노동 고용시장에 대한 획기적인 개혁안이었으며 언론은 이를 두고 독일이 이제 '유럽의 병자'에서 '건강한 부인'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제도 개혁에 더해 독일의 전통적인 가치이자 강점인 일자리 공유 시스템(해고 대신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는 제도), 노사 간 공동 의사결정제도, 노동자의 생산성 및 기술 경쟁력 등이 뒷받침되면서 독일 경제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경제 위기에 휩싸인 상황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무엇보다 '어젠다 2010'을 통해 독일 경제의 경쟁력을 한 단계 높였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p.452~453

노동시장을 개혁한 '어젠다 2010'은 실업급여 단축, 해고의 자유성 확대, 연금 및 의료보험 의무가입자 확대, 퇴직연금보험 정년 연장 등 도입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어젠다 2010'으로 슈뢰더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죠.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어려움에 처해있던 남유럽과 달리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슈뢰더의 개혁은 재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캐나다의 시작은 독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1993년 캐나다는 국가 부채가 GDP 대비 약 75퍼센트에 달하여 OECD 국가 중에서 이탈리아 다음으로 부채 수준이 높았습니다. 예산의 3분의 1이 국채의 이자 지불 비용에 배정될 정도로 규모가 컸습니다. 해외 투자자들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죠. 이 시기 폴 마틴은 재무 장관으로 취임합니다. 그는 두 가지 원칙으로 금융위기에서도 견딜 수 있는 캐나다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엄격한 금융 시스템과 '적자재정 금지' 원칙이었습니다.

캐나다 금융 시스템은 엄격한 자기 자본 규제, 우선주 등을 배제한 보통주 위주의 자본 규제, 그리고 낮은 레버리지 비율 등으로 설명되지만 그중에서도 감독 체제가 빈틈없고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p.460~461
마틴은 예산안을 마련하면서 '적자재정 금지(No-Deficit Rule)' 원칙을 정착시켰으며 이를 국민들과 약속함으로써 훗날 어떤 정부도 이 원칙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틴의 이러한 국가 부채 삭감 노력으로 GDP 대비 최고 71퍼센트였던 국가 부채 비율은 30퍼센트 이하, 이자 지급 비용은 달러당 36센트에서 절반 이하인 15퍼센트로 대폭 낮아졌다. 아울러 과거 GDP 대비 44퍼센트에 달하던 외국인 보유의 캐나다 국채 비율도 7퍼센트로 낮아져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해도 캐나다 경제가 위협받을 가능성을 대폭 낮추었다.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p.468

돈이 있으면 투자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캐나다의 투자 은행도 모기지 시장처럼 많은 이익을 내는 시장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의 금융 시스템은 위험한 시장에 참여하는 걸 제한했습니다. 이웃나라 미국의 금융 시장이 커가는 걸 캐나다 은행은 많이 부러워했을 겁니다. 폴 마틴의 정책은 인기가 없는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에 모기지 시장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캐나다의 엄격한 금융 시스템은 위기를 비껴갈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해외 투자자에게 의지하지 않는 국가 재정은 금융위기에서도 끄떡없는 캐나다가 될 수 있었죠.



기회가 찾아왔을 때 리더가 있던 일본은 기회를 살려서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리더가 없던 이집트는 경제가 무너졌습니다. 독일과 캐나다는 리더의 개혁을 통해 2008년 금융 위기를 비껴갈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이집트, 독일, 캐나다 모두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집트는 뉴욕 증시 폭락, 일본은 인플레이션과 대공황, 독일은 화폐가치 절상과 실업률, 캐나다는 멕시코 패소 위기를 겪었다는 점입니다. 경제 정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확실한 리더가 있으면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경제 대통령들의 결정이 중요한 이유는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경제정책을 세우는 지도자가 이를 잘못 판단할 경우 지도자 한 사람의 실패로 끝나지 않고 국민 전체의 실패로 직결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역사를 보면 성공을 거둔 현명한 지도자는 단기 주의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국민들에게 장기적인 안목을 제시하고 그에 걸맞은 정책이 실행될 수 있도록 국민을 설득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즉 단기적인 시각에 지배되던 민심을 장기적인 시각을 받아들이도록 바꾸고 이 민심 위에 자신의 정책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유재수 <세계를 뒤흔든 경제 대통령들> p.484

이는 일반 대중에게도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우리가 경제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단기적인 시각이 아닌 장기적인 시각의 메시지를 던지는 정책자를 지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GDP가 세계 10위인 경제대국이지만, 잘못된 정책으로 이집트나 아프가니스탄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깐요. 우리에게 경제공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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