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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고비 Oct 12. 2023

Cycle 7, ALMA

진동 전달 서비스 : 당신의 진동을 전달해 드립니다 #10.

2020. 12. 30.


“서윤아. 이게 얼마만이야. 한국 돌아와서는 처음이지. 사업하더니 사람이 달라졌네. 그치. 네가 이제야 사람을 대하는 법을 알게 된 거지. 상대가 세 번을 먼저 연락했으면 나도 한 번은 해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구나."

민경은 언제 만나도 어제 만났다 헤어진 것처럼 서윤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 예민해져 있던 서윤도 민경 앞에선 웃는 얼굴이 되었다.

”우리 서윤 좀 마른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형한테 털어놓자."


민경이 서윤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뭘 알고 그러는 건지 알아내려고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학부 시절부터 민경이 모르는 우리 과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술을 따르면서도 민경은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친구들의 소식까지도 줄줄 읊고 있었다.


“재희 결혼식 갔다 왔어. 그래도 우리 학번에서 한 명은 가야 할 것 같더라고. 마침 일본에서 학회도 있었고. 행복해 보이더라.”

”재희 잘 살 거야. 남편이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

”너 혹시 재희 때문에 얼굴이 이런 거야? 아직도?”

서윤이 대답을 하지 않자 민경이 서윤의 빈 잔에 술을 채워준다. 몇 번이나 술잔을 비우고 나서야 민경이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이상하긴 한데 재희 너랑 헤어지기 전부터 상철이 형이랑 만나고 있었어. 그러니까.”

민경의 말이 길어지려고 하자 서윤이 민경의 말을 잘랐다.

”나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그래 놓고 재희 받아준 거야?”

민경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서윤을 쳐다봤다.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몇 년을 고민했다는 게 억울했던 모양이다.

”일본에 와서 정리하고 재희 학교 알아보고 복잡한 일이 해결되고 나니까 재희가 말하더라고. 상철이 형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서 낳고 싶은데 혼자서는 못 낳겠다고 제발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더는 바라지 않겠다고. 내가 거절하면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어. 재희 아버지도 부탁하셨고."

세상의 모든 소식을 다 알고 있는 민경마저도 이건 몰랐던 것 같다. 오랜 시간 봐왔던 친구지만 이렇게까지 놀라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임재희 진짜 단서윤한테 너무 했네. 게다가 임교수님까지 그렇게 말했다고? 너한테는 재희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다는 말만 들었잖아. 그래서 재희가 일본 따라가서 돌아오지 않고 둘이 다시 잘해 보려는 것 같아서 우리들은 다 조용히 하자고 그랬던 건데. 왜 진작 물어볼 생각을 안 했지. 하긴 그때는 물어도 단서윤이 대답도 안했을 거야.”

민경은 고개를 저으며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결과적으로는 해 준 게 없었어. 그리곤 얼마 안 되어서 바로 유산되고 그다음부터는 재희는 재희대로 나는 나대로 지냈어. 가끔 밥이나 같이 먹고."

서윤의 얼굴도 이미 붉어진 상태였지만 민경이 건네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았다.


”뭘 어떻게 더 해 줘야 해 준 게 있는 거야. 네가 없었으면 재희가 왜 일본에 계속 있었겠어. 그리고 단서윤이 퍽이나 아무것도 안 해줬겠다. 어미 잃은 새 한 마리만 봐도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 새끼를 잃은 전여자 친구이라. “

민경은 말을 해 주지 않은 서윤에게 삐져버린 건지, 아니면 서윤을 대신해서 재희에게 화를 내야겠다 생각한 건지

목소리가 높아진 상태였다.

“재희가 바라는 건 못 해줬으니까. 재희랑 사귈 때도 그랬고.”

“단서윤 마음을 갖기는 어렵지. 나도 이렇게 연락 한번 받기가 힘든데 마음까지 갖는 건 바라지도 않아. 넌 참 이상해. 차가울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해. 그래서 기대하게 하는데 마지막엔 또 차가워. 재희도 기다리기 힘들었겠어. 내가 재희 편을 드는 건 아니고."

서윤이 화제를 돌리며 민경의 근황을 물었다. 대학 시절에는 붙어 다니며 서로의 하루 일과를 꿰던 사이었지만 민경이 결혼을 한 후에는 얼굴 한번 보기가 어려워졌다. 민경과 꼭 닮은 둘째 사진을 한참 보며 힘들다고 엄살을 떠는 민경의 넋두리를 한참 들어주었다.


“이제 네 차례야.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한 거야.”

기대 없이 물은 민경의 예상과는 달리 서윤은 기다린 사람처럼 준비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ALMA 천문대, cycle7에 참여하는 거지?”

“그렇지. 일 년 동안 중단 되었다가 이제 시작하려고 하지.”

“돌려 말하지 않을게. cycle7에서 확정된 관측계획이 필요해.”

”정말 이상하지만 너를 위해 준비했다는 듯이 당장 알려줄 수 있지. 왜냐하면 얼마 전에 나한테 뜬금없이 연락해서 똑같은 걸 물어본 사람이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정리를 딱 해서 이메일로 보냈거든. 참 이상한 일이야. 그치. 서윤아?"

이미 민경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모양새다. 서윤도 민경에게 더는 숨길 것이 없었다.


“은우였구나."

민경은 이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민경이 오래 간직했던 질문을 서윤에게 던졌다.

“서윤아. 너한테 은우는 뭐야? “

2009년 8월.

“이번 우리 과 신입생들 중에 기균도 있다며.”

“와. 과가 망해가는구나.”

“아니 지균은 최저라도 있지. 지균이 있는데 꼭 기균까지 있어야 하는 거야. 근데 누구야. 수업은 이해하나?”

매년 한 번쯤은 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역균형이 누군지에 대해, 공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도돌이표처럼 계속되었다. 정시로 들어온 사람들과 특기자전형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주로 말을 꺼내는 쪽이었는데 당연하게도 그 말속에는 자신들의 우월함과 억울함이 묻어있었다.

“나도 지균이야. 그런 말들 불편해.”

불편한 논쟁에는 좀처럼 끼어들지 않는 서윤이 나선다. 이 정도에서 끊지 않으면 이번엔 실명이 나올 차례다. 누가 없는 자리에서 시작된 말들은 돌고 돌아 결국 가장 상처를 받는 사람의 귀로 들어가고 만다.

“어허. 거기 두 분. 우리 서윤이 미방 연습문제 풀이가 아니면 과제를 못 내는 과장님과 부 과장님이 아닌가. 듣는 지균 불편해하면 미방 숙제 우리가 해야 한다구!”

어색해질 법한 분위기를 풀어주는 건 이번에도 민경이다.

“야 김민경. 우리는 학교 일이 너무 많아. 서윤이 지균이 다른 지균이랑 같냐. 우리 학교를 50명씩 오는 학교에서 지균 받은 거잖아. 서윤이 정시로 다른 과도 갈 수 있었던 거 누가 모르냐.”

두 사람이 사라진 후 민경이 서윤에게 조심히 말한다.

“너 왜 그래. 그만 티 내.”

“뭘?”

“네가 그러면 애들이 더 알아. 기균 정은우야?”

서윤이 민경을 쳐다보자 민경이 더 작은 소리로 말한다.

“나는 눈치가 지나치게 빠르니까 아는 거고, 다른 애들은 모른다. 그치만 너 자꾸 이러면 알게 될 거야. 왜 정은우 일만 생기면 이성을 잃어? 너무 불쌍해? 아니면 좋아해?”

“그런 거 아니야.”

“서윤아. 어려운 미적 문제는 잘도 풀면서 어쩜 이리 쉬운 문제에는 답을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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