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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고비 Oct 12. 2023

우주 배경 복사

진동 전달 서비스 : 당신의 진동을 전달해 드립니다 #8.

2020년 12월 26일 대전.


"Jay Kim. 천체사진작가. 2020년 3월 10일 칠레로 촬영을 떠남.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칠레에도 코로나가 발생했다는 전화를 마지막으로 며칠 후에 아타카마 사막에서 은하수를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약혼자에게 전송. 배터리 방전 문제로 촬영 여행 중 연락이 끊기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연락이 올 수도 있다 생각하며 기다렸으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핸드폰이 켜지지 않았고 그 사이에 칠레 국경이 폐쇄됨. 현재 약혼자는 수신자가 사망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음."

서윤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은우의 보고서를 읽으며 메모를 하고 있다. 그리 긴 보고서가 아니어서 다시 읽어 새로운 내용은 없었지만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떼어내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2020년 12월 26일, 서울


“우주 공간에서는 시간과 거리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해요. 여기 카시오페아 자리에서 관측된 Cas A라는 초신성이 있어요. 이 초신성까지의 거리는 약 만 광년이고요. 지구에서 Cas A가 가장 밝게 빛나 보이던 해는 1604년이지만, 실제로 폭발은 그보다 만년 전에 있었던 거죠. 여기까지는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거예요.

그럼 이제부터는 우주배경복사 이야기를 해 볼게요. 왜 우주 초기에 출발한 빛을 계속해서 볼 수 있을까요. 동시에 출발한 빛이지만 우주 나이가 10억 년 된 시점에는 10억 광년 거리의 우주배경복사가 우리 은하에 도착했고, 138억 년 현재 우리 우주에는 출발 당시 138억 광년 거리에서 출발한 빛들이 이제 막 사방에서 도착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우리는 이 빛을 계속 만나게 될 거예요.

신기한 건, 이 빛을 우연하게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던 특정 주파수의 전파를 그저 잡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사실은 우주의 시작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였는데도 말이죠. 지금도 우주에서는 수많은 빛이 오고 있어요. 누군가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일 겁니다. 마치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말이죠.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2014년 12월 30일


“오빠 일본 가기 전에 제가 밥 한번 사도 되나요? 제가 오빠한테 빚이 많이 있잖아요. 그거 갚고 싶어요.”

은우가 망설임 끝에 서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래 망설인 은우의 문자와는 달리 답장은 빨랐다.

“그래. 나도 가기 전에 한번 만나고 싶았어."

서윤의 출국을 삼일 앞둔 저녁이었다. 두 사람은 숯불 위에 올려놓은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술잔을 비웠다. 오랜 시간을 알아왔지만 둘이 술을 마신 적은 처음이었다.


“왜 교사가 된 거야?”

“오빠는 알잖아요. 저는 실패하면 안 되는 사람인 거.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어허. 그런 눈으로 또 쳐다보지도 말고요. 제가 살면서 제일 부러웠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마음껏 실패하는 사람. 실패해도 누군가 옆에서 괜찮다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그래서 한참 생각했어요. 뭘 해야 하나. 저 원래 사범대 가고 싶었거든요. 선생님들이 말려서 안 갔는데 쭈욱 후회하고 있었어요. 왜 그렇게 밋밋하고 평범하게 살려고 그러냐고 그러시길래, 알겠다고 그럼 물리천문학부로 간다고 했는데요. 그런데 제가 원하는 게 그런 거더라고요. 보이지 않는 점처럼 사는 거. 그래서 교직 이수 했죠. 이수했으니까 임용을 봤고. 그러는 오빠는 왜 해양물리 대학원으로 가요? 그것도 다른 나라, 다른 학교로? “

은우가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한 적이 있었을까. 이미 술잔을 여러 잔 비운 은우가 서윤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보고 싶어서. 이미 일어난 일을 내가 확인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잖아. 내가 보지 않는다 해도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거고. 내가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바다는 다르잖아. 최소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이니까.”

“오빠도 과거가 싫구나. 나도 그런데. 그게 뭐라고 나를 자꾸 잡아당겨요.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데, 나 그렇게 티가 났어요? 엄청 불쌍해 보이고 주눅 들어 있고 그랬어요? 안 그러려고 했는데. 오빠가 잘해주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오해한 거 알고 있어요? 그런 거 아니라고 해도 그럼 왜 리포트를 모아서 주냐, 밥을 왜 계속 사주냐, 장학금 양보한 건 알고 있냐 그러면 할 말도 없고.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요. 혹시요. 불쌍하게 생각한 게 아니라 저를 좋아한 적이 있었나요?"

라고 말했을 때는 이미 은우가 많이 취해 있었다. 서윤이 뭐라 말해도 기억하지 못할 것처럼.


"마음이 쓰였어. 계속.”

“그건 좋아한 거랑은 다르죠. 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재희 언니였던 거죠.”

혼잣말인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이었다. 은우조차 서윤이 듣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채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근데 저 만난다고 해도 재희 언니가 뭐라 안 해요? 재희 언니한테도 연락해서 같이 나오라고 했는데 대답 안 해서.”

“재희랑 헤어졌어. 두 달 정도 되었나. 그냥 내가 차였지.”

담담한 서윤의 말에 놀란 사람은 은우였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는지 정리되지 않은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아깝네. 그럼 좋아했었던 적이 있냐고 물어볼 게 아니라 현재형으로 물어봐야 되는 거였는데. “

“저는 좋아했습니다. 단서윤 씨를. 아니. 지금도 좋아합니다.”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돼서. “

은우가 이제 거의 테이블과 얼굴을 마주대고 있다. 혼잣말을 하는 건지 서윤에게 묻는 건지 구별이 안 될 정도이다.


서윤도 사실은 답을 모른다. 왜 재희와 헤어졌을까. 삼 년을 만나도 싸운 적이 없었는데.

‘너 나를 좋아하기는 해. 나를 보면 설레? 나랑 잘 때는 어떤 기분이야. 다른 사람이랑 할 때보다 좋아? 내가 예쁜 거 말고 내가 좋은 이유가 있어?”

분명 재희가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마지막 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날 서윤이 재희의 질문에 어떤 정답을 내놓았다면 헤어지지 않았을까.


테이블 위에 쓰러지려고 하는 은우를 서윤이 일으켜 세웠다.

"가자 은우야. 집에 데려다줄게.

은우가 서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니요. 나 안 갈 건데. 저 진짜 오래간만에 노는 거예요. 놀 거예요. 오빠 바쁘면 가요. 저는 혼자서도 재미있게 놀 수 있답니다."

은우가 가도 좋다는 손짓을 하며 다시 테이블에 앉으려 한다.

"그래 놀아. 대신 여기서 나가자."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너 하고 싶은 거 해. 하고 싶은 게 뭐야."

“다요. 다른 사람들 하는 거 다. 다 하고 싶어요. 우선 너무 잠이 오니까 나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어요.”

“이렇게 추운데?”

“나는 오늘 그런 거 생각 안 하려고. 돈이 없어서. 과외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저 사람이 애인이 있어서. 가요. 내가 살게요.”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춥다고 후회하는 은우의 아이스크림을 대신 먹어치우고, 새까맣게 태우기만 하고 먹지 않은 고기를 아까워하며 배가 고프다 말하는 은우와 치킨을 먹고, 맥주 한 잔에 알굴이 빨개지는 서윤을 보고 드디어 단서윤이 못하는 걸 찾았다며 깔깔대며 좋아하는 은우를 보며, 서윤은 그동안 몰랐던 재희의 물음에 대한 정답을 알게 되었다.

너여서 좋았다 말해야 했다는 것을. 너의 웃음 때문에 설레고 너라서 안고 싶었다고. 그래서 너에게 입을 맞추고 같이 밤을 보내고 싶었다고.


“이제 된 거야? 다음에 하고 싶은 게 또 있니?”

“우리에게 다음이 있는 건가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가게에 남은 손님은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서윤과 은우뿐. 서윤이 대답을 하지 않자 가게의 음악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갈까요?”

서윤의 대답을 기다리다 어색해져 버린 은우가 일어서자는 눈빛을 보냈다.

“아니. 조금만 있자. 이 노래까지만.”

한동안 서윤과 은우는 말을 하지 않은 채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유심히 듣지 않아 들리지 않던 노래 가사가 너무나 분명하게 들렸다.

https://youtu.be/ckNhoH8QUZw?si=hDPJrObMITZPFfD7

“가사가 좋네요. 일어날까요?”

은우가 서윤의 눈을 피해 탁자로 시선을 돌리자 서윤이 몸을 일으켜 은우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이제 나가자."

은우가 서윤이 내민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서로의 손끝을 타고 전달되었다.


가게 옆 좁은 골목길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랜 입맞춤이 계속되었다. 긴 밤이었다. 두 사람에게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두 사람이 원하는 건 분명 했고 원하는 걸 피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처음 보는 서로의 표정과 낯설지만 떨리는 감촉으로 긴 겨울밤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연락할게 은우야. 들어가.”

서윤이 밤새 꺼둔 핸드폰을 켜자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다. 전화를 달라는 재희의 문자를 하나씩 하나씩 지웠다. 전화를 끄기 전부터 울리던 전화였다. 전화를 해야 할까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재희는 헤어지자 말해놓고도 종종 이런 식으로 연락을 하곤 했으니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다급하게 전화를 하면 그제야 연락이 안 되니까 불안하다고 말하곤 했었다.


문자를 모두 지우고 답장을 보내려고 했다. 이제 연락하지 말자고. 만나는 사람이 생겼으니 더는 연락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재희의 첫 문자를 보기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었다.

“서윤아. 계속 통화가 안되더라고. 설마 전화번호 벌써 지운 거야? 나 재희야. 할 말 있는데.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해. 만날 시간이 없으면 지금 말할게. 나 임신했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같이 가 줄 수 있어? 거기까지만 해주고 너는 일단 출국해. 내가 따라갈게.”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서윤은 재희가 아닌 은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은우야. 오늘 못 만나겠어. 일본 가기 전에 일정이 생겼어. 나중에 설명할게. 미안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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