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그램 donggram Oct 27. 2021

반항아가 자라온 세상

어린 시절의 나는 사춘기가 강하게, 그것도 아주 강하게 온 아이 중 한 명이였다. 방이 너무 지저분한 것 같아 방을 치우려는 찰나 '방 좀 치워라'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면 절대 방을 치우지 않겠노라 다짐했고, 시험 기간이니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찰나 '공부 좀 해라'는 선생님의 말을 들을 때면 커다란 한숨과 함께 책상에 엎드려버리곤 했었다. 그런 나를 어른들은 '반항아'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맞서 대들거나 반대하는 아이. 또는 그런 사람' 대한민국 1위 포털사이트에 나와있는 '반항아'의 정의다. 이 포털사이트의 말대로라면 나는 반항아가 분명하다.


반항아였던 내가, 어른들이 하는 대부분의 말의 끝에 던졌던 질문은 '왜요?'였다. '왜 공부를 해야 돼요? 왜 교복을 줄이면 안 돼요? 왜 학교에 올 땐 꾸미면 안 돼요? 왜 머리가 짧아야 수업에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학생은 왜 남자 친구를 사귀면 안 돼요?'


참 아쉽게도 내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는 어른은 거의 없었다. 내 부모님마저도. 그저 하라면 하지, 왜 이리 말이 많고 따지는 게 많냐는 훈계만 돌아올 뿐이다. 공부를 해야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학생은 단정한 게 예쁘니까, 성인이 되면 네 마음대로 화장도 하고 연애도 할 수 있으니까 라는 식의 답변들은 반항기 가득한 나를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학창 시절의 모든 시간을 반항아로 살았다.




남들보다 더 지독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던 아이는 자라서 직장인이 되었다. 생계를 위해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아보려 노력해봤지만, 어른이 된 후에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가 불합리한 제도를 실시할 때면 누구보다 먼저 이의를 제기했고, 이해되지 않는 요구사항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합리적이지 못한 규칙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강압적인 지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는 마치 '트러블 메이커'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나에게 합당한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어른은 그리 많지 않았고, 심지어 더 나은 방안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정한 대로 좀 따라와 줄 수 없냐'며 질타를 받기도 했다. 학생 때의 나와 회사원일 때의 내가 비슷하듯, 선생님들과 상사들의 반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순응. 그것을 하지 못하는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반항아'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의 반항기를 잠재워준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중학교 시절 성적이  좋았던 나는,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학업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와 동시에 ' 이렇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생각을 하기 시작했었다. 이렇게나 재미없는 공부라면 때려치우고 내가 좋아할 만한 일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처음 '뷰티'분야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꼬박꼬박 드라이를 하고, 하교 시간이 다가오면 책상 앞에 쌓아놓은 책들 뒤에 숨어 메이크업을 하고, 돈이 생기는 족족 그 대부분을 화장품 구매에 쏟아붓곤 했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 집에 오면 엄마에게 맞으면서까지 고집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배워봐도 좋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좋아하는 일을 찾아 공부를 시작한 나는, 교무실에서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그래 매일 교실에서 잠만 퍼질러 잘 바에 뭐라도 해보던지'라며 나를 비웃었고, 내가 하는 공부는 '그거라도'가 돼있었다. 그러다 복도에서 우연히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선생님은 나에게 '민정이 미용 공부 시작했다며?'라고 말을 걸어오셨다. '공부만 잘한다고 성공하는 세상이 아닌데, 일찍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 같아서 너무 대견하네. 너는 뭘 해도 잘할 애야.' 선생님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워낙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하시기도 했고, 나이가 지긋하셨기에 더욱이 이런 말씀을 해주실 줄 몰랐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한 마디는 내 마음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이왕 시작한 공부니 더 열심히 해보자는 의지는 물론이고,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년 스승의 날에 연락드리는 유일한 분이 되어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때의 공부를 시작으로 화장품을 기획하는 사람이 되었다.




반항아가 살기에 참 친절하지 못한 세상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어딜 가나 선생님 같은 존재가 한 사람씩은 있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나를 믿어주고,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주되 그 이유를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은 나의 신랑이다. 신랑은 어떤 제도에도 잘 순응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잘 이해해주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에 대해 왜 해야 하는지 부드럽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주었고, 그와 동시에 나에게 본인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내 생각을 비난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신랑의 얘기를 듣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 신랑의 말에 납득이 가곤 했다.


'저는 이해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럴 때도 있어요. 나 같으면 저렇게 안 할 텐데, 그렇더라도 가만히 지켜보면 결국에는 좋은 쪽으로 가더라고요 효리는.' 유 퀴즈에 출연했던 이상순이 이효리에 대해 했던 이야기다. 신랑은 이 방송을 보면서 나를 향한 본인의 마음 같다고 했다. 나를 바라보다 보면 분명 시행착오들이 있지만, 묵묵히 기다려주다 보면 늘 좋은 쪽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을 보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지 라는 의지가 생기곤 한다.


사실 세상의 모든 반항아들은 '날 조금만 믿고 기다려주세요'라고 외치는 중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늘이 보내준 천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