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토스 학자들
세상을 이루는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만약 존재한다면 이들이 세상 만물이 되는 기본 원리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자연에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찾아내려 하면 자연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러한 구성 요소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할 만한 준거는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자연의 근본적 구성 요소가 존재한다면 요소가 만물의 다양성을 구현해야 하므로 이를 가능케 하는 어떤 근본적인 원리 아래 포섭되어야 한다. 만약 자연이 하나의 으뜸 원리에 의해 운행된다면 이보다 근원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 이성의 호기심은 자연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원리로써 단일한 것이 있기를 원한다. 인류가 자연에 대한 단일 원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오래되었다.
자연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사유는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의 창조와 변화를 다양하고 대단한 상상력으로 묘사한 그리스 신화가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면 수천 년 전에 창작되었다고 하기엔 너무 놀라운 상상력의 장대한 서사시를 가진 문화적 전통인지는 몰라도 그리스였다. 시기적으로 호메로스의 작품이 등장한 지 약 2백 년 후의 일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기원전 6세기에 밀레토스 학파는 그 시작을 알렸다.
인류 최초의 과학자인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얼핏 보기에 터무니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때의 물을 물질로 보지 않고 어떤 원리라고 보면 이해가 된다. 자연의 모든 것의 근원이 물이라는 정의는 자연의 원리가 어떤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물과 같은 물리적인 요소라고 뜻이다. 물은 온도에 따라 고체 액체 기체로 변하는 유일한 물질이기에 지구 상의 다양한 물질의 상태 또한 설명할 수 있기에 그럴듯한 법칙이 될 수 있다. 얼핏 보기에도 땅은 엄청난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지진의 원인을 물의 흔들림의 결과로 추론할 수 있을 만큼 바다나 강의 너울성 파도는 크다. 다양한 현상이 물로부터 비롯되므로 물은 최초의 상태이며 자연의 다양한 존재의 기반이라는 일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의 주장을 물이 생명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만물이 물의 본성으로부터 설명되므로 자연이 어떤 자연법칙에 근거한 개념이 정립된 모양새이다. 그의 사유는 자연을 주제로 철학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자연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에 대한 인류 사상 첫 번째 과학적인 질문이었다. 그 이전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탈레스의 사유는 향후 다양한 과학적 사유의 개념 정립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불멸의 추상적인 물리적 존재인 아페이론(무한자)을 우주의 원리로 상정했다. 하나의 아페이론에서 원초적인 대립자들이 분리되어 우주가 생성되고 변화를 거듭하여 파괴 후 아페이론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우주가 생성된다. 자연을 이루는 원소(물질)들이 아페이론에서 생성되어 자연 질서가 형성되었다고 본 것이다. 아페이론은 생명의 탄생에도 관여한다. 우주가 생성될 때 생명은 태양의 온기가 습한 요소에 작용해 생성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더 나아가 우주를 유기적 단일체로 생각하고 체계화된 모형으로 운행을 설명한 최초의 우주론을 구축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기상현상 또한 설명하였는데, 기상 현상은 우주가 형성될 때 가해진 것과 같은 힘과 과정이 지구 상에 지속해서 작용한 결과이다. 무한자의 개념으로 우주의 생성, 생명의 탄생 및 유지, 물질의 기원, 더 나아가 기상 현상 등 모든 자연현상을 일관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비록 우주론은 소박하지만 어떤 단일 법칙 아래 조화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우주의 작용을 최초로 제시한 사례로서 오늘날의 법칙 아래 설명하는 과학과 매우 닮아 있다.
아낙시메네스는 아페이론이라는 무규정적인 것에서 규정적 물질이 생성된다는 논리를 반대하고 근원이 어떤 성질이 아니라 그러한 성질들을 가진 사물들로 규정하였다. 탈레스의 물 대신에 공기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공기는 응축, 희박, 뜨거움과 차가움이 가능하지만 같은 물질로 남으므로 근본적이다. 그러므로 공기는 실체이다. 이 공기가 여러 속성을 가져 각종 변화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실체와 속성을 구별하여 근원을 설명하려 한 것으로 그의 이론은 발전된 것이다.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응축을 통해 단계적으로 바람, 구름 및 물이 되고 흙, 돌이 된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것들로부터 생성되는데 운동으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운동에 대한 초기 버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밀레토스 학파는 후대에 자연의 근원에 대한 담론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자연의 근원은 어떤 단일한 것이 근원이라는 일원론적 주장은 철학과 과학에서의 단일 법칙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낳게 하였다. 단일 법칙 하에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생각은 가장 최고의 이성적 사유의 전통이 되었다. 일원론적 관점에서의 이론 정립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므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모든 것의 이론으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최상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자연이 일원론으로 해석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자연이 그렇게 구성되어졌을지도 모르고 이원론, 다원론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근원이 반드시 물질의 형태를 띨 필요도 없다. 자연의 근원(또는 근본)을 추상적인 어떤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사유는 깊어지고 성숙해졌다.
우리가 보는 자연은 변화(운동)한다. 무엇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하지만 변화의 이해는 정지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 무엇을 알려고 할 때 우선 그것을 정적인 관점에서 알려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변화를 구상할 수 있는 것은 정적 관점이 변화적 관점보다 접근하기가 쉬울 뿐만이 아니라 정지는 운동의 연장 선상에 있다는 관점에서 정지의 이해는 선행적이다. 자연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정적 관점에서의 자연에 관한 이론이다.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에 관한 정적 사유는 근원의 물질적, 추상적 실체와 같은 다양한 질문 생성의 기폭제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동적 관점에서 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위한 길을 열어 주었다. 다원론과 변화가 담론이 된 시대는 밀레토스 학파와는 적어도 수십 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다. 정적인 사유가 여러 다른 관점에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토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