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떠나보내며
1. 비가 온다. 여름/방학과는 이제 헤어질 시간. 학기는 곧 시작이고 참 막막하다. 실타래를 푸는 심정으로 뭐라도 써본다.
2. 6월에 강연과 발제 하나씩 한 것 말고는 여름 내내 쉬었다. 영성과 몸을 돌보는 책도 보고 그걸 실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게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일종의 '피정'의 시간..
3. 그중에서도 숲길을 걷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가을과 겨울에도 아내와 매일 몇시간씩 걸을 듯 하다. 아내와 달리 나는 왜 하는지 잘 모른다. 그냥 한다. 굳이 멋진 말을 찾으라면.. 걷고 있는 순간의 현존성 때문이랄까??
4. 솔직한 지금 심정은 휴직이라도 하고 더 걷고 더 쉬고 싶다. 제도화된 일상을 견딜 수 있을까?
5. 토요일 늦은 오후에 두어 시간 걷는 중에 조금 어둑한 숲길 안으로 들어온 빛줄기를 보았다.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와....'
길을 멈춘 내게 아내가 다가왔다. 잠시 서서 함께 숲 안으로 늘어진 빛줄기의 흐름을 쳐다 보았다. 태연한 척 했지만 목줄기가 따끔한 것으로 봐서 감격한 것 같다.
6.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늘 들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가 원하는 삶을 줄 수 있다고 호언한다. 난 대단한 신앙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7.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건 하나님은 해결자라기보다 아픈 우리 곁에 함께 서 계신다는 점이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기억과 기대의 하나님이기보다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있는 현재성의 하나님이다.
8.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립과 고통의 영혼과 함께 한다. 거기 내가 본 숲길의 빛줄기처럼 말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차분히 위로받고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9. 그리고보니 여름 동안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계속 말한 것 같다. 너 참 애썼다고.. 그런데 그만.. 그렇게 애쓰지 말라고.. 부시리기를 놓고 염려하지 말라고.. 들에 핀 백합처럼, 생명으로 그냥 존재하라고.. 지어진 대로 나답게 살라고.. 평생 동안 배운 지식을 걸고 쌓아둔 의미와 관계들이 차례로 퇴색해도 정말 괜찮다고.. 그래도 변할 것은 없다고..
10. 아직 모르겠다. 다행인 건 많은 현자들이 넘치는 메타포로 극찬한 가을 걷기의 계절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11. 학교는 아마도 일주일에 두어번 갈 것 같다. 거기서 수업을 하고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릴 것 같다. 아크릴로도 그리고 유화로도 그리고 그림은 걷기 만큼이나 내게 선물과 같은 낭비/거룩의 시간이다.
12. 교회에서는 '로마서'나 '요한복음'을 공부할 것 같다. 그것도 기대가 된다. 지난 봄에 '갈라디아서' 공부가 참 좋았다. 거기서 소망의 단초를 찾은 것 같기도 하다.
13. 연구활동은.. 아직 뭘 다시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하는 일은 내 삶의 지위지향성과 별 상관이 없다. 분리된, 파편화된, 고통과 고립을 조장하는 지식만 일단 경계한다. 내가 획득할 수 있는 것보다 내가 선한 마음으로 줄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려고 한다.
14. 아무튼 여름은 이렇게 지나간다. 야속하다. 세상으로 다시 나아갈 때인데.. 뭐든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15. 14번까지 쓰고 읽어보니 한편으론 안심도 된다. 글에 '모른다'는 구절이 많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이 많다면 내 인생이 심각하게 위험하지 않다는 신호이다. 모든 걸 잘 아는 자신만만한 자아, 속도의 인생을 사는 것은 아주 위태로운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