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자리로 안전보건관리자가 다가왔다.
"오늘부터 산업안전보건 동영상을 시청하셔야 합니다. 5월 31일까지는 꼭 시청해주세요."
J에게만 한 말은 아니었다. 관리자는 사무실 전체를 빙 돌며 한 명도 빠짐없이 그 말을 전하고 있었다.
5년차 회사원 J는 입사 이래 지금까지 매년 그 동영상을 수강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저 틀어놓았다. 그의 앞에 있는 두 대의 컴퓨터. 자주 쓰는 컴퓨터는 왼쪽 컴퓨터. 화면이 더 크고 화질이 더 좋다. 오른쪽 컴퓨터는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두 대의 컴퓨터를 가졌으니까 형식상으로라도 J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산업안전 동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저 '수료'라는 글자가 눈 앞에 보이면 그걸로 끝이다. 시험도 없고, 일하느라 바쁘고, 귀찮고, 아무도 안보니까.
오늘도 그저 틀어놓았다. J는 어쩌면 이렇게 비효율적인 것을 해야할까라는 생각을 5초정도 해보지만, 이내 다른 일을 하느라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3개의 동영상을 수강하는데 2달의 시간을 준다. 문제는 잊고 있다가 막판이 되어서야 한다는 거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3월에 J에게 찾아온 안전관리자는, 5월 20일이 되자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찌푸린 미간 사이 주름을 조금도 감추지 않으면서 말했다.
"J대리님, 아직도 동영상 수강을 하지 않으셨네요."
"오늘부터 수강하겠습니다."
J는 굳이 그 짜증섞인 목소리에 똑같이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어.
J는 작업하던 엑셀 파일을 왼쪽으로 옮기고, 다 낡아 먼지가 쌓인 오른쪽 컴퓨터로 시선을 보낸다. 차가운 시선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오른쪽 컴퓨터는 흐릿한 화면을 깜박인다. J는 교육 시스템으로 들어가, 산업안전교육을 튼다. 틀어놓으면 자동으로 다음 회차로 넘어가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손수 해줘야한다. 배속도 안되고, 건너뛰기도 안된다.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오늘도 다 듣지 못했다. 다음 회차로 넘어가는 걸 계속 잊는다. 다른 파일들과 작업물들이 앞쪽으로 치고나와 교육 동영상은 시야에서 이미 사라져버렸다.
5월 29일.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귀찮은 과정을 반복하다가 1개의 동영상을 여전히 수료하지 못했다. 아침 9시 14분, J는 기억해내자마자 그 영상을 서둘러 튼다.
9시 47분. 사무실 안이 분주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안전보건관리자가 여기 저기 전화를 걸고, 받고, 뛰어다니고, 땀을 흘린다. 별로 친하지도 않던 그 관리자를 눈으로 좇았다.
현장에서 파레트를 옮기던 직원이 파레트에 깔려서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심각한 수준이다. 허리가 거의 부러졌다고 한다. 그의 몸 위로 30키로에 육박하는 파레트들이 쏟아졌다. 지게차를 이용하지 않고, 혼자, 스스로의 몸을 이용해 일을 하려고 했나보다. J는 그가 6개월 이상 입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년에는 직원이 사다리를 오르다 떨어져, 다리가 크게 다쳤다. 재작년엔 지게차에 부딪혀 실려간 직원이 있었다. 몇 년전에는 일하다 죽은 사람이 있다고도 들었다. J는 비슷한 사건이 매년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잠시 동료들에게 다친 직원의 얘기를 듣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곤 동영상을 빤히 쳐다보았다. 매년 듣는 동영상, 매년 일어나는 사고. J는 그 동영상의 플레이 버튼을 다시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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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안전관리자가 명단을 들고 사무실을 돈다. 아직 동영상을 수료하지 않은 사람들.
"J대리님, 10분만 더 들으시면 됩니다."
"사고 난 직원분은 어떠신가요?"
"산재처리할 겁니다."
어떻게 처리할건지를 묻는 건 아니었는데 안전관리자의 귀찮은 듯한 태도에 J는 입을 다물었다.
'의미도 없는 걸 왜 하는거야. 누가 이걸 본다고. 실질적인 건 하나도 하지않으면서..'
하지만 수료해야했다. 하지 않으면 회사가 불이익을 얻는다. 누가 다쳐도, 죽어도 이렇게 조용한 회사가, 누구 하나 때문에 불이익을 얻으면 그를 쥐잡듯이 잡을 것이다.
J는 마지못해 마우스 커서를 플레이 버튼에 가져간다. 10분 후, J의 머릿속에서 현장에서 일하던 그 직원의 모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