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배트맨을 부르는 것이 더 빠르겠어.

간곡하거나 더 절실한 동의.

by 이동민

밤늦게 도착한 도쿄, 항상 그러하듯 나와 아내는 배가 고팠다. 숙소에 짐을 푼 우리는 주변에 어떤 맛집이 있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거리로 나왔고, 어느 곳이든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시간이 심야에 가까워져서인지 일반음식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독채로 되어 있는 고급 음식점들만이 듬성듬성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결국 골목을 헤매던 중, 아내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소라'였다. 어느 일식집의 벽면 어항에 붙어있던 소라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소라 엄청 맛있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아내가 말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잠시 해둬야 할 말이 있다. 아내는 '~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동의를 구했지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 사실 이것은 청유의 문장이 아니다. 여기서 내가 순진하게 '나는 해산물이 별로라서..' 혹은 '오래간만에 도쿄에 왔으니 난 라멘이 먹고 싶은걸'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오, 소라네! 먹고 싶다, 들어가자!' 혹은 '이런 우연이 있나, 나 사실은 오늘 아침부터 소라 생각이 났었거든'밖에 없다. '간곡한 동의' 혹은 '더 절실한 동의'


다행히도 주문했던 '버터구이 소라'는 아내(혹은 우리)를 만족시켰고, 우리는 신이 나서 디저트로 녹차 아이스크림까지 연이어 달성했다. 그리고 배가 불러졌을 때 즈음, 나는 이 곳이 도쿄의 부촌 중 하나인 '시로가네다이'라는 것을 떠올렸고 지금 수중에 현금이 1엔도 없는 것을 깨달았다. 인류의 역사상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마침 카드를 취급하지 않는 가게였으니 일본에 거주했음에도, 카드를 취급하지 않는 영업점이 많이 있다는 것을 망각했던 안일하고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독한미식가고로상.JPG

"저기 사장님, 호텔이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입니다만, 아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제가 금방 호텔에 들려 현금을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가족(당시 여자 친구)을 인질로 두고 위험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참으로 비루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머릿속에 왜란 당시 가족과 백성을 등지고 도망가는 선조가 오버랩이 되는 찰나, 이윽고 버터 소라구이 군단의 우두머리인 사장님이 이야기했다. "괜찮습니다. 내일 가져다주세요."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고, 나는 완패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영업시간에 맞춰 현금을 가져간 내게, 그는 웃으며 일본 특유의 '감사합니다'를 전했다. '어떻게 처음 본 외국인 관광객을 믿을 수 있을까, 대체 이 사람의 자신감은 무엇일까?' 궁금해진 나는 물었고, 그는 또 가볍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있잖아요, 우리 누나가 한국인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다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어느 토요일 밤 혼돈으로 어우러진 신논현역 사거리. 한눈에 보아도 일본인 아주머니 3명이 택시를 잡고 있다. '이 시간에 여기서 저렇게 소극적인 자세로 택시를 잡고 있다니, 차라리 옥상에 가서 조명으로 배트맨을 소환하는 게 빠르겠어.'라 생각하며 나는 어쩔 수 없이 다가간다. "어디까지 가세요, 몇 명이세요?"부터 시작해 택시를 잡아주기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또 헤어진다. 말하기 민망하지만 내게 이런 종류의 일들은 계속 반복되어 이제 별 감흥과 보람을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종종 버터 소라구이 대장님을 떠올리고는 한다. 그들에게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너무 구차하고 시간이 없기도 해서, 그냥 그렇게 가끔 생각만 할 따름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킥킥거리며, 대충대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