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대포동 박 여사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11-
11화. '대포동 박 여사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
2부.
11.
"누구시길래 타인의 부동산에 무단침입을 범해!"
법정 드라마에도 안 쓸법한 문장을 실제로 듣는 날이 오다니.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물체가 우리를 향해 랜턴을 비추고 있었다. 랜턴에 눈을 직선으로 맞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는 분명히 우리의 눈을 조준해서 랜턴 빛을 쏘고 있다. 프로의 솜씨다. 닌자일까. 상대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서움을 느낀다. 역시 시선은 권력이다. 눈을 찡그려 본다. 랜턴을 손에 쥔 상대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어허! 왜 대답이 없어!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법정에서 불리해져!"
빛을 쏘고 있는 형체가 나에게 다가온다. 형체의 모습은, 호모 사피엔스라기보다는 오뚜기에 가까웠다. 참 동그랗고. 또 동그랗다. 시력을 거의 되찾을 즈음 상대를 자세히 보니, 눈에 익은 사람이다.
"대답 안 해?"
"안녕하세요. 저희는 강병1동 주민센터 직원!"
"어? 당시 501호지?"
빛을 쏘던 오뚜기의 정체는 내가 사는 집의 주인인 ‘대포동 박 여사’였다. 근데 박 여사가 지금 내 앞에 왜 있지? 지난달 월세를 내가 입금을 안 했나? 근데 그걸 받아내려고 여길 찾아온다고? 요새는 채권 추심업체도 이렇게 못 하는데? 출장지는 어떻게 알았지? 박 여사가 팀장님을 두들겨 패서 알아냈나? 모든 게 의문이다.
"안녕하세요! 강병1동 주민센터 주무관 이수진이라고 합니다. 이계성 할머니 사건 관련해서 왔습니다. 혹시 이계성 할머니 가족분이실까요?"
싹싹한 수진이가 먼저 나섰다. 박 여사는 랜턴을 바닥으로 내렸다.
"나는 이 집 소유주예요. 이 집 문 좀 고치려고 왔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깜짝 놀랐네. 그건 그렇고. 501호 공무원이었어?"
"안녕하세요. 인사를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저 주민센터에서 일한다고 계약할 때 말씀드렸었는데. 하하."
"그래? 집 내 준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내가 기억을 못 하겠네."
"아니에요. 당연히 그러실 수 있죠! 근데 이 집. 집주인 남자분이지 않아요? 그 말 많으신 할아버지."
"말 많은 남자? 아! 우리 아저씨? 우리 아저씨는 언제 또 만났어? 이 집은 우리 아저씨 명의긴 한데. 그냥 내 집이야. 그렇게 알아두면 돼. 더 묻지는 말고. 우리 아저씨는 그냥 바지 사장이야. 이게 또 돈의 세계가 있어. 자세히 물어보지는 마."
마침 잘됐다. 어차피 이계성 할머니 사건으로 집주인이랑 이야기 할 게 많았는데. 이런 대화라면 말 많은 할아버지보다는 냉철한 박 여사가 낫다.
"됐고. 이야기는 우리 아저씨한테 대충 들었어. 이 집 사는 세입자 병원으로 실려 갔다며. 근데 119놈들이 이 집 문고리만 박살 내놓고 갔어. 썩을 것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말이야. 그래서 수리 좀 하려고 들렀지."
박 여사 손에는 공구함이 들려있다. 박 여사는 문고리 수리 비용마저 아까웠던 모양이다. 부자가 되려면 저 정도로 표독하고 성실해야 할까. 어색한 상황에 우물쭈물 서있던 수진이에는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커피라도 사오겠다며 나갔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어떻게 해서든 집주인 박 여사를 구워삶아야 한다. 수진이는 전쟁통에 풀려난 포로처럼 어색한 걸음으로 총총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나저나. 501호가 여긴 무슨 일이야? 계성댁 집에 뭐 훔치러 왔어?"
"계성댁이요?"
"이계성 씨 말이야. 고향을 물어봐도 통 답을 안 해줬어. 근데 계성댁 하는 짓이 완전히 자기 멋대로인 게, 북한 같더라고. 그래서 그냥 북한에 있는 개성 느낌이나 내볼까 싶어서 계성댁이라고 불러. 우리 아버지 고향이 개성이기도 해서 정감도 가고. 뭐 문제 있어?"
과연 박 여사다. 박 여사의 나이는 이계성 할머니보다 어린 게 분명하지만, 이런 권위적인 방식으로 이계성 할머니도 찍어 눌렀을 거다. 근데 이계성 할머니가 그 전략에 굴복했을 사람이 아닌데. 누가 이겼을지 궁금하다. 박 여사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하고 이계성 할머니의 신분증을 가지러 왔음을 말했다. 다행히 박 여사는 남편에게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이계성 할머니 사건을 알고 있었다.
"계성댁 신분증은 나한테 있어.“
”그게 왜 박 여사님한테 있어요?“
”내가 계성댁 도망갈까 압수라도 했을까 봐?“
”아니요. 그건 아닌데.“
”됐고. 계성댁이 자꾸 자기가 지갑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거야. 근데 자기가 주민등록증은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나한테 주민등록증을 맡아달라고 하더라고.“
”그걸 왜 박 여사님한테 맡겨요?“
”모르지 나야. 근데 내가 이걸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계성댁한테 세입자한테 월세 말고는 아무것도 안 받는다고 거절 했는데, 계성댁이 우격다짐으로 나한테 주더라고. 근데 노인네 뭔가 결연한 게 느껴져서 나도 무슨 말을 더 못하겠더라. 그래서 신분증 받아뒀지. 개성댁이 왕래하는 사람도 없는데, 긴급상황 대비해서 내가 가지고 있어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계성댁 주민등록증 나한테 있어. 내가 우리 아저씨 통해서 주민센터로 보내줄게."
"감사드려요! 저희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주신 계성댁, 아니. 이계성 할머니 주민등록증은 이계성 할머니 입원한 병원에 바로 전달할게요."
"근데. 계성댁 집은 어떻게 해?"
"확실한 건 아닌데, 이계성 할머니 건강 상태면 아마 요양병원에 입원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 중이에요. 이계성 할머니가 병원 진단 결과 나오면 결정하실 거예요."
"그래? 계성댁 요양병원 가게 되면 이 집도 정리해야 하지 않아?"
"통상적으로 요양병원 입원하시게 되면 주소지도 요양병원으로 옮겨질 거예요. 그럼 아마도 이 집은 이계성 할머니 가족분들이 정리를 하시거나. 만약. 아주 만약에라도 이계성 할머니 일 봐줄 가족분들이 아예 없으면, 구청 복지정책과에서 변호사랑 논의하고 관련 절차가 진행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도 당장에는 확정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요. 절차를 잘 모르기도 하고."
"알겠어. 관가에서 하는 일이니 뭐 문제없이 하겠지. 만일 구청에서 개입하는 거면 계성댁 집에 있는 짐들은 어떻게 처리해?"
"글쎄요. 아마 구청 복지정책과에서 사회적기업 같은 데에 운영하는 짐 정리 서비스로 짐들은 치울 수 있을 거예요."
"아니다."
"네?"
"이봐 501호. 얼마 안 있으면 501호 계약 만료지? 그 오피스텔 아주 구축도 아니고. 출퇴근하기 딱 좋은 위치라서 인기 많은 거 알지?"
"알죠. 알죠. 우리 박 사장님 안목과 배려 덕분에 제가 잘 지내고 있습죠."
"말 길게 하는 건 귀찮고. 501호가 계성댁이 직접 하든. 계성댁 가족들이 해주든 여기 이계성 할머니 짐들 문제없이 치워주게만 만들어 봐. 그리고 이계성 할머니 주소지도 다른 곳으로 옮겨주면, 내가 약속하고 501호 보증금이랑 월세 동결해. 아니다. 월세도 5만 원 빼줄게."
이게 웬 떡인가. 박 여사는 이번 기회로 이계성 할머니를 해치우려는 모양이다. 대포동 박 여사가 아무리 굳센 인간일지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이계성에게 몇 번 봉변을 당한 모양이다. 그러니 그 냉철한 박 여사가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내가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박 여사의 제안은 나에게 엄청난 이익이니까. 드디어 나에게도 복이 오는구나. 하지만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는다. 박 여사의 제안을 덥석 물면, 박 여사는 나의 곤궁함을 이용해서 분명히 재계약 조건을 건들 게 분명하다. 상대는 프로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히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우리 박 여사님 요청이니까. 제가 결초보은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근데.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계성댁이. 요양병원으로 주소를 옮기든, 가족들이 이 집을 정리하든. 계성댁이 원하는 대로, 자기 의지로 일을 진행했으면 해. 최소한 계성댁한테 어떤 피해도 없어야 하고."
역시 박 여사다. 재산이나 주소지 같은 문제들은 법적 분쟁이 발생하기 쉽다. 박 여사는 여기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말이다. 역시 보통이 아닌 박 여사의 판단력! 존경을 표한다. 다만. 나도 법적 분쟁에 휩싸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씀하신 부분이야 당연히 노력해야죠. 근데. 혹시 이계성 할머니가 직접동의를 해야 한다거나, 피해가 없어야 한다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봐 501호. 내가 이유까지 설명해야 해?"
"아니. 그게 아니라. 음... 아! 이계성 할머니나 가족분들한테 이야기 꺼낼 때. 저도 뭔가 재료가 있어야 하잖아요. 아시다시피 박 여사님도 워낙 수완이 좋으시니 제안할 때 써먹을 재료가 필요하다는 건 아시잖아요. 하하."
"그게 옳은 일이라서 그래."
"네?"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이라서 그렇다고. 돈 문제가 아니라 사람 된 도리 뭐 그런 거 말이야. 그리고. 계성댁이... 아 몰라. 더 묻지 마. 그게 옳은 일이야. 내가 아까 말한 대로 계성댁 주민등록증은 우리 아저씨 통해서 주민센터로 바로 보내줄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가서 딱 기다리고 있어."
더 질문해 봐야 남는 건 없을 것 같다. 박 여사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해서든 이 집에서 이계성 할머니를 축출하겠다는 각오일까. 짚이는 이유는 없다. 역시나 박 여사도 이계성 할머니의 안하무인이 겁이 날 테니까. 하긴. 박 여사라고 어쩌겠는가. 깊이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뭐 어떤가. 박 여사의 제안은 나한테는 노다지다. 보증금도 안 올리고, 월세까지 내려준다? 이거 완전 잔치라도 벌여야 하는 조건이다. 나는 그저 하면 된다.
박 여사는 혹시 모른다며 나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고, 대충 정리하고 가보라고 했다. 박 여사는 대포동 미사일에 올라탄 듯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수진이와 박 여사는 마주쳤지만 박 여사는 수진이와 말도 안 섞고 저 멀리 계단 위로 훨훨 날아갔다.
“오빠. 이거 커피... 어쩌지?”
"그건 됐고. 수진아. 나 행복해졌다."
"왜 그래? 근데 저 사람이 오빠 집주인이야?"
"응. 너도 얼굴은 외워둬. 대포동 박 여사라고. 이 일대에서는 수완가로 유명하니까."
"그건 그렇고. 근데 저 사람 이 집 문고리 고치러 왔다고 하지 않았어? 문고리 안 고치고 그냥 가시는데?"
"생각 해보니까 그렇네. 하지만 수진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나는 2년이 보장된 행복의 문고리를 잡았단다."
"오빠. 커피가 아니라 숙취해소제를 먹는 게 어때? 취한 게 분명한데."
"훗. 수진아. 나의 행복을 질투하지 말렴."
수진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캔커피를 나에게 건넨다. 수진이가 준 캔커피를 단숨에 원샷을 때린다. 박 여사, 이계성, 이계성의 자녀여. 그대들의 눈동자에 치어스. 그리고 다가올 나의 재계약을 축복하며 한 번 더 치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