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12-
12화. "참을 인(忍) 세 번이면"
2부.
12.
수진이와 함께 주민센터로 복귀한다. 새삼 기분이 좋다. 불행만 있던 일상에 한 가지 광명이 비추는 기분이다. 월세란, 돈이란 그런 거다. 겨울이 주는 날카로운 추위마저도 지구온난화가 가짜라는 증거로 느껴진다. 점심을 먹고 나니 사람 관찰하기를 좋아하며, 말이 많고, 박 여사의 남편이자, 바지 사장인 할아버지가 주민센터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 추운 날에 슬리퍼를 신고 오셨다. 말 많은 할아버지의 발은 빨갛다 변해있었다.
"거 이계성 할매 담당자가 누구요."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오랜만이네요. 요새는 관찰이 잘 되시나 봐요. 아주 신수가 훤해지셨네요."
"긴말은 됐고. 여기 이계성 할매 주민등록증. 우리 여편네가 아주 고약해. 오전에 전화로 나한테 당장 당신한테 가서 이계성 할매 주민등록증 주고 오라고 그러더라고. 한창 내기 장기 중이었는데, 시국을 건 나의 승부를 방해할 수 있나. 내가 냉큼 성질을 내고 끊어버렸지! 근데 5분이나 지났나? 갑자기 여편네가 내 옆에 떡하니 서 있는 거야. 그러고서는 갑자기 장기판을 엎어버리는데! 이야 이거 완전히 화산 폭발도 이런 화산 폭발이 없어! 자네 혹시 백두산 폭발설 알아?"
슬슬 말이 길어진다. 잘라내야 한다.
"아이쿠야 할아버지! 주민등록증은 잘 받을게요. 박 여사님께 이계성 할머니도 문제없이 처리할 거고. 짐들도 아무 문제 없이 해결하겠다고 전달 해주세요."
"왜 난 할아버지고. 마누라는 박 여사야? 섭섭하게 말이야. 근데 그건 그거고. 이봐 공무원 양반. 이계성 할매는 죽는 거야?"
"잘은 모르겠어요. 저도 입원 수속 밟은 다음부터는 뵌 적이 없어서. 안 그래도 주민등록증 병원 가져다 드리면서 한번 살펴보고 오려고요."
"역시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참 유능해. 근데 이 여편네는 5분 만에 나 찾아서 장기판 엎을 능력이면 자기가 주민등록증을 가져다 동사무소로 가져다 주지 왜 나한테 시키고 그래? 참나 원. 내가 참는 거야! 세상이 좋아져서 원!"
말 많은 할아버지는 시대에 맞지 않게 주먹을 꼭 쥐고 내 앞에서 흔들어댄 뒤 주민센터 밖으로 나간다. 일단 행운병원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전달하자. 가서 이계성 할머니 눈치도 좀 살피고. 기회를 틈타 이계성 할머니한테 요양병원 입원을 유도해야겠다. 혹시 아는가. 이계성 할머니도 놀랐을 테니 내 말을 순순히 따를지. 그러면 나의 월세 계약서는 갱신될 거고. 나의 안심은 2년 더 갈 수 있게 된다. 재계약만 되면 바로 행정고시 준비를 해야겠다. 난 이런 일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팀장님께 출장 다녀온다고 보고를 한 뒤 휘파람을 불며 행운병원 원무과로 향한다.
"안녕하세요. 강병1동 주민센터 주무관 강동노입니다. 원무과에 이계성 할머니 관련해서 전달해 드릴 게 있어서."
"이계성이요? 잠시만요. 이름이 익숙한데... 아! 12층 그 할머니요? 지금 당장 담당자 불러드릴게요."
이계성 할머니는 어느새 병원에서도 '그런' 사람으로 유명세를 탄 모양이었다. 어떤 과정이었는지 그림이 그려진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주변 화자와 의료진에게 악다구니만 쓰고 있었겠지. 모두가 나처럼 이계성 할머니를 욕하면서도 피하고 있을 테다. 역시 이 세상에 나만 느끼는 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또 자각한다. 나의 평범함에 안도한다.
이계성 할머니 원무 담당자를 찾으러 간 직원의 뒷모습 넘어 병원 사무실 풍경이 보인다. 병원 원무과는 저소득층 환자들을 돕는 사회사업팀과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직원들의 표정에서 고통이 느껴진다. 이 사람들도 나랑 비슷한 일을 하는구나. 나나 이 사람들이나 누군가의 불행을 원자재로 사용하는 불행 블루칼라 노동자들이구나. 직원들 모두 표정이 없다. 넌지시 한 직원의 업무 모니터를 살핀다. 구인구직 사이트였다. 이계성 할머니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담당자와 나는 책상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담당자는 간장에 절여진 감태 마냥 축 처져 있었다.
"지난번에 말씀 주셨던 여기 이계성 할머니 주민등록증 가져왔습니다. 바로 드릴게요."
"이계성 환자분 담당 공무원이신 거죠?"
"네. 일단은 뭐 그렇습니다. 이계성 할머니는 좀 어떠세요?"
"다행히 입원하시자마자 신속히 의료적 개입이 되어서, 이계성 환자분은 의식도 되찾았고. 신체 활동도 어느 정도 가능하세요. 다만."
원무과 직원은 '다만'이라는 글자를 뱉었다. 그리고 화를 꾹꾹 누르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이계성 환자분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놀랄만큼 비협조적이시네요. 그래서 간호사 선생님들이 워낙 고생이 많아요. 저도 고생이고요."
"어떤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당한 게 많아서 십분 이해합니다. 고생이 많으세요. 이계성 할머니가 워낙 좀... 그... 그런 분이라."
"이계성 환자분 치매가 의심되는 정황이 많아요. 게다가 치매 증상 발현인지, 아니면 정신과적 문제인지. 폭력적 성향도 강하게 나타내는 분이라."
"이계성 할머니가 폭력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몇 번 맞을 뻔했거든요, 아마 곧 병원 직원분들한테도 손찌검을 하실 텐데."
원무과 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쏘아본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자기의 눈을 연신 비벼댔다. 이것마저도 나와 같구나. 그리고 원무과 직원 말을 이어갔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계성 환자분 주변 정리를 하셔야 할 거예요. 이계성 환자분이 악성신생물... 그러니까 암, 정확하게는 폐암 말기세요. 이계성 환자분이 통증 치료나 연명치료는 안 받겠다고 하시는데. 이 의미를 이계성 환자분이 정확히 인지 하시는지도 모르겠어서 저희도 난감해요. 이럴 때는 가족분들이 정리를 도와주시는 게 맞는데. 제가 원무과에서 전달받은 말로는 이계성 환자분 가족관계가 단절된 상태라는 거죠?"
"네. 맞습니다. 제적등본도 확인 해봤는데 이계성 할머니 부모님이야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혼인관계증명서에 배우자 기록은 없는데, 가족관계증명서에 자녀가 한 분 확인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연락처를 확보해서 자녀분이랑 이야기를 해봤는데. 가족분은 이계성 할머니는 자기 가족도 아니라고. 신경 안 쓰고 싶다고 하시네요."
"그렇군요, 종종 있는 경우죠."
"그렇지요. 왕왕 있는 경우죠."
"그럼 저희도 이계성 환자분 업무를 보호자 없는 환자로 업무를 진행해도 될까요?"
"그러셔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이계성 할머니의 집이 말끔하게 정리되어야 내 대업을 이룰 수 있다. 만약 지금 이렇게 병원에 모든 일을 맡겨버리면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진다. 그러다 이계성 할머니가 자기 마음대로 퇴원 해버리고 집에 돌아와 눌러앉으면? 낭패다. 이것만 문제가 아니다. 만일 이계성 할머니가 집에 돌아가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시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폐암 말기 환자가 집에서 고독사했고 공무원이 이를 방임했다는 기사가 나올지도 모른다. 기사의 첫 문장은 '죽음을 방조한 무책임 공무원, 이대로 괜찮은가?'일 테고 집 재계약과 함께 직장인으로서 누리는 평화도 분쇄될 게 분명 하다.
머리를 굴려본다. 그래. 이계성 할머니를 꾀어보자. 이계성 할머니한테 병으로 겁을 주고 이 기회에 똥궁빌라 집은 정리하고 요양병원에 입원하자고 설득 해보자. 죽음에 관한 일이니, 이계성 할머니가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폐암과 죽음인데 아무리 이계성 할머니라 할지라도 집을 정리하는 걸 동의하겠지.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결연할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이계성 역시 사람인데 이와 다를쏘냐.
그렇게만 된다면, 바로 복지정책과에서 운영하는 집 정리 서비스를 신청하면 된다. 정 안 되면 내 사비라도 써서 이계성 할머니 집을 정리할 각오도 있다. 정산을 해봐도, 역산을 해봐도 이계성 할머니 집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나한테는 모든 면에서 이익이다. 역시 난 유능하다. ㅇㅇ대학교 사회복지학과 09학번 수석 입학, 수석 졸업에 길이 빛나는 나 강동노. 이 완벽한 업적을 통해 명성과 실익을 모두 얻겠노라.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낸 뒤 원무과 직원의 눈을 응시한다.
"아니에요. 원무과 직원분께서 덜 고생하실 수 있도록. 제가 한번 이계성 할머니랑 직접 이야기를 해볼게요. 제가 이계성 할머니가 스스로 요양병원에 입원을 선택하실 수 있게 설득 해볼게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네? 갑자기요? 저희야 감사하기는 한데."
여기서 원무과 직원의 경계심을 확실히 무너뜨려야 한다.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눈을 살포시 감는다. 그리고 그 결심을 선포하겠다는 듯이 번쩍! 하고 눈을 뜬다.
"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이계성 할머님의 존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계성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일 수도 있는데. 이계성 할머니가 스스로 삶을 정리할 기회를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그게 인간 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눈을 하고 있던 원무과 직원의 눈이 그렁그렁 해진다.
"감동이네요. 아직 이런 분이 남아 있다는 게. 제가 다 부끄러워지네요. 저는 짜증만 내고 아무것도 안 하려 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저희도 최대한 협조해 드릴게요. 필요한 부분 있으면 저한테 뭐든 말씀 주세요."
"아닙니다. 저는 공무원의, 아니!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건데요 뭘. 지금 바로 이계성 할머니 만나볼게요. 제가 이계성 할머니 입원 호수를 알 수 있을까요?"
원무과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존경을 담은 눈빛을 보여준다. 나한테 반했으려나. 이놈의 인기는 죽지를 않는구나. 이계성 할머니 일이 끝나면 원무과 직원에게 수작을 부려봐야겠다. 원무과 직원에게 거부당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나도 진심은 아니니까.
원무과 직원은 나에게 이계성 할머니의 입원 병실이 1201호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원무과 직원은 이계성 할머니가 입원한 병실 담당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전후 사정을 설명한다. 묘하게 즐거워 보인다.
"제가 이계성 환자분 입원한 12층 담당 수간호사님한테 말씀은 미리 드렸어요. 아마 올라가시면 바로 일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계성 할머니한테 가볼게요. 무슨 문제 생기면 어려워 말고 저한테 연락 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해요. 아직 이런 공무원이 계실지 몰랐어요. 좋은 모습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저희도 너무 잔인하게는 일을 안 하려고 하는데. 어쩌다 보니..."
"아녜요. 다 이해합니다. 나중에 같이 커피라도 같이 해요. 저는 올라가보겠습니다!"
이계성이라는 문제적 인간의 제거, 집 재계약 성공, 병원 원무과 직원과의 연애와 결혼이라는 목적을 모두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콧노래를 부르며 12층으로 이계성 할머니의 병실로 향한다. 경쾌한 즐거움도 잠시. 병원 특유의 육중한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니 이계성이라는 현실이 성큼 다가온다. 역시나 무섭다. 이계성 할머니가 내 뜻대로 될 사람이었으면 이 지경까지 안 오지 않았을까. 내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오히려 일만 더 커지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어쩌면 모든 게 박 여사의 함정이지 않을까. 참 치명적인 여자다. 삶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왜 저렇게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걸까. 그냥 두런두런 살다 가지.
우박 같은 잡념에 후두두 맞으며 12층에 내린다. 좌향좌. 앞으로 가. 그렇게 1201호 문 앞. 몸 안에서 무언가가 울컥울컥 치밀어오른다. 두려움. 그리고 혐오였다. 주먹을 꽉 쥔다. 이를 꽉 문다. 참자. 이번만 참고 넘기자. 이 더러운 짓 꾹 참고 성공하자. 난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 난 유능하다. 심호흡을 한다. 이계성 할머니를 찾자.
"시끄러! 나 멀쩡해! 나갈 거야! 네놈들이 억지로 잡아다 놓고서는 병원비를 운운해! 도둑놈의 새끼들. 네놈들 다 공산당 같은 놈들이야!"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이계성 할머니의 뜬금없는 공산당 검거 시도가 나의 비장한 기합을 박살 낸다. 에휴. 공산당이라면 이계성 할머니에게 의료비를 요구하지 않을 텐데. 무엇보다 공산당이 진짜 있었으면, 이계성 할머니 같은 인간은 당장 아오지 탄광이든 시베리아 형무소든 바로 보내버렸을 거다. 그리고 대충 호상으로 꾸며 세상에서 이계성 할머니의 존재를 지워버렸을 거다. 참자. 참자. 참을 인(忍) 세 번이면 김일성과 스탈린도 성군이 되었을 거다. 아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려나. 망상을 멈추자.
"아이구. 이계성 할머니. 저 강병1동 주민센터,,, 아니 동사무소 직원이에요. 기억하시죠? 할머니 도와드리려고 제가 여기까지 왔어요."
이계성 할머니는 '이 새끼는 또 뭐지'라는 눈으로 나를 흘겨본다. 참을 인(忍) 1회.
"옳커니. 드디어 네놈이 쓸모가 있겠구만. 당장 나 여기서 나가게 해."
"할머니. 그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여기서 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그래야 동사무소 와서 소리도 지르시고. 김치도 훔쳐 가시고 그러죠."
좋은 접근은 아니었다. 다만 이계성 할머니가 반박을 하지 않는다. 이계성 할머니는 지금 자기 처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아는 것 같다. 영악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아니야. 나 안 아파. 아주 멀쩡해."
"의사 선생님한테 설명 들으셨잖아요. 할머니 치료 받으셔야 해요. 치료 잘 받으실 수 있게. 제가 할머니 주민등록증도 가지고 왔어요. 짜잔!"
"짜잔? 개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리고. 네가 왜 내 주민증을 가지고 있어? 이 도둑놈의 새끼. 내 이럴 줄 알았다. 동장 오라 그래! 시장 나오라 그래! 대통령 나오라 그래!"
주변의 환자와 간호사들이 놀라서 나를 바라본다. 수치스럽다. 이계성 할머니한테 합리적 판단을 기대한 내가 바보다. 이계성 할머니는 인간의 언어를 배운 오랑우탄 같은 존재란 걸 잊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그래도 참자. 참을 인(忍) 2회.
"병원에서 할머니 주민등록증이 꼭 필요하다고 저한테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주민등록증은 이계성 할머니 집주인 내외분이 저한테 찾아주셨어요. 아시죠? 박 여사님. 퉁퉁하신."
"사람 외모 가지고 헛소리 말아! 하여간 호랑이 상인 놈들은 하여튼 상종을 하면 안 돼."
"지금 할머니 말이 가장 외모비하..."
참자. 참을 인(忍) 3회 완성. 아직까지 내가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옛 성현의 말이 옳다는 걸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하아... 할머니. 지금 할머니 몸이 많이 안 좋아요. 그러니까 병원에서도 입원을 강하게 권하잖아요. 저는 못 믿으셔도 의사 선생님들은 믿으셔야죠."
이계성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이계성 할머니가 나의 의견에 들이받지 않은 건 처음이다. 아마 이계성 할머니는 의사라는 말에 기가 죽은 모양이다. 나도 의대를 갔어야 했나. 이해가 가기는 한다. 일개 9급 공무원 말은 안 들어도, 의사 선생님들 말이라면 껌뻑 죽는 게 못된 인간들의 특성이다. 기필코 행정고시에 합격하리라.
"시... 시끄러! 병원비는 그럼 누가 낼 거야! 누가 낼 거냐고. 이 도둑놈들아!"
"할머니. 할머니 긴급입원 하셨을 때 제가 자녀분이랑 연락을 했어요. 외람된 말씀이기는 한데, 할머니랑 연락 안 하고 지내신 지도 오래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자녀분이 이계성 할머니를 부양할 의사가 없다고 명시적으로 밝히셨어요. 이게 사실이면 그럼 할머니 병원비 안 내시게 제가 후원자원을 연결해드릴 수 있어요."
이 말은 사실이다. 이계성 할머니의 사연을 가지고 민간 영역의 의료비 지원을 끌어당길 계획이다. 강남에 집도 있는 사람 병원비를 왜 도와줘야 하냐고? 할머니의 강남 집은 병원비 지원 신청 서류에서 누락시킬 계획이다. 어차피 민간 영역의 지원은 재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의 보고서가 병원비 지원 결정의 근거가 된다. 즉,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지금까지의 병원비도 해결된다. 여기에 더해 의료비 지원 금액을 최대치로 늘린다면, 이계성 할머니가 가게 될 요양병원 비용도 1년 정도 때울 수 있다.
그 이후는? 내 알 바 아니다. 나 역시도 9급 공무원 말은 안 믿어도. 의사의 소견을 믿는다. 이계성 할머니는 머지않아 다행히, 죽을 거다. 이런 생각을 순식간에 해내는 스스로에 대해 어색함을 느낀다.
"뭐? 우리 딸이랑 통화를 했어?"
아뿔싸. 이놈의 주둥이가 문제다. 딸이랑 통화했다는 말은 안 했어야 했다. 괜히 입 잘못 놀려서 일을 망치게 생겼다. 옛말에 사람의 입은 죄를 짓는 구멍, 즉 작죄구(作罪口)라고 했다. 역시 옛말은 얼추 맞는 말이다. 내 주둥이가 화를 부른 구녕이 되어버렸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여. 쩨쩨하게 굴지 말고! 나도 나쁜 놈이지만 속죄하겠습니다. 십일조도 9개월 정도 할 테니 한 번만 구해주쇼.
"할머니. 그게 아니라. 할머니 빨리 병원 치료 받으시고. 병원비도 해결하기 위해서 합법적인 절차로 매우 적절하게 통화를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제가 병원비도 해결 해드릴 수 있는 거잖아요."
"너 우리 딸 어디 사는지 알아?"
망했다. 모든 게 망했다. 이계성 할머니한테 자녀의 연락처나 주소지를 말해주면 이계성 할머니의 자녀는 나의 행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거다. 그럼 난 징계를 받겠지. 소송까지 간다면 빨간줄도 긋게 될 거다. 그러면 나는 행정고시 응시 불가는 둘째 치고, 지금 공무원 직위도 파면될 거다. 반대로 이계성 할머니 자녀에 관한 정보를 말 안 해주면 이계성 할머니한테 매일매일 끝도 없이 시달려야 할 거다. 무엇보다 어떤 결론이든 박 여사가 나에게 준 임무는 실패로 귀결된다. 막아야 한다.
"할머니. 그게 그렇니까..!"
"됐고. 너 말대로 할 테니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그러면 군말 없이 너 말대로 요양병원인지 뭔지에 들어갈게."
이계성 할머니는 말을 멈추고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공산당을 찾던 분노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이계성 할머니의 모습은 평범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자기 몸은 자기가 안다고. 나 지금 안 좋은 건 나도 알아."
일이 이렇게도 풀릴 수가 있나? 참을 인(忍) 3번을 했더니 진짜 세상이 나에게 기회를 주는구나.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생물학적 아버지만큼 감사드립니다.
"네. 할머니 말씀대로 할게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다른 분도 아니고. 저에게 항상 큰 관심을 주시던 이계성 할머님이시니. 제가 어머니 같아서 제가 노력 해볼게요. 할머니 현재 주소지 정리나 짐 정리도 제가 우리 강병1동 주민센터 에이스들만 선별해서 완벽하게 해결 해드릴게요."
이계성 할머니의 눈꼬리가 올라간다. 다시 분노가 충전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계성 할머니가 마음의 틈을 보여서, 질주했는데 과했던 걸까. 아마 이계성 할머니의 참을 인(忍)도 숫자가 올라 갔으리라. 이렇게 쎔쎔.
"알았어. 어차피 짐이랄 것도 없어. 박 여사님이 잘 처리 해주실 거고."
"그럼 이계성 할머니 부탁이라는 게 뭔지 말씀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우리 딸한테. 뭐 하나만 전달 해줘. 우리 딸이랑 통화도 했다면서. 그런 어떻게 해서든 전달은 할 수 있을 거잖아. 내가 직접 줄 수는 없는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우리 딸한테 뭐 하나만 전달해 주면, 너 말대로 요양병원 들어갈게. 집도 너네 마음대로 하고."
이계성 할머니는 몸을 좌우로 돌리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계성 할머니는 긴급입원을 했기 때문에 따로 들고 온 게 없으실 텐데. 뭘 그렇게나 찾고 있는 걸까. 혹시 치매 증상인 걸까. 이계성 할머니가 처음으로 불쌍하다.
"아이씨. 집에 두고 왔네."
"네?"
"미친놈아. 너가 나를 병원으로 납치했지? 평생을 들고 다닌 건데, 너 때문에 집에 두고 왔잖아! 그걸 전달해야 하는데, 네놈 때문에 집에 두고 왔단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할머님이 의식이 거의 없으셔서."
"시끄러! 이래서 호랑이 상인 놈이랑은 상종을 못 해. 동장 나오라 그래! 구청장 나오라 그래! 의사 선생님도 모셔와!"
구청장한테도 반말인데 왜 의사만 존칭일까. 역시나 더러워서 이 짓 오래는 못 하겠다. 간호사들까지 투입되어 격노한 이계성 할머니를 겨우 진정시킨다.
"할머님. 좀 진정하시고. 일단 제가 할머니 집에서 부탁하실 물건을 가지고 올게요."
"진작에 네가 들고 왔어야지! 내가 너 자식 같아서 한 번만 참는 거야. 내 집 TV 아래 서랍장에 분홍색 공책이 있어. 그거 가지고 병원으로 당장 튀어와. 얼른! 당장!"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거죠?"
"내가 그 공책에 뭘 좀 써서 줄테니, 우리 딸한테 전달만 해."
"전달만 되면, 요양병원 들어가시는 거죠?"
"몇 번을 물어봐! 그렇게 한다니까!"
뜬금없이 배달부 노릇까지 하게 생겼다. 근데 갑자기 공책에 뭘 써줄 테니 자녀한테 전달해달라? 역시 이계성 할머니와 자녀와의 관계는 단절은 아닌 게 확실하다. 사연이야 뻔하다. 이계성 할머니가 자기 재산을 자녀한테 옮기기 위한 작업일 테지. 이제서야 이계성 할머니 자녀가 전화 통화에서 나에게 보였던 비상식적 행동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상관없다. 가족관계가 단절이든 증여세를 탈세하든 내 알 바인가. 난 그저 이계성 할머니와 더 이상 안 엮이고, 집 재계약만 잘 되면 그만이다.
"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계성 할머니의 명령을 되뇌며 병실에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1201호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간다. 머리가 또 아프다. 한 의사가 나를 멈춰 세웠다.
"저기. 이계성 환자분 담당 공무원이신가요?"
"네. 강병1동 주민센터 주무관 강동노입니다. 그리고 일단은 이계성 할머니 담당 공무원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안녕하세요. 이계성 환자분 담당의사입니다. 원무과에서 대충 들으셨겠지만. 이계성 환자분,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가족분에게도 준비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야 하는데. 가족분과 여의치않으신 거죠?"
"그... 네. 맞습니다. 보시다시피... 좀 그러셔서, 가족분들한테도 그러셨나 봐요."
"그럼. 마무리 하실 때까지 고통을 덜 받으시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실 수 있도록 저희도 할 수 있을 만큼 해보겠습니다."
"이계성 할머니는. 죽는 거죠?"
"급한대로 수술도 할 수 있고. 항암 치료도 병행해야겠지만. 현재 이계성 환자분 상태라면, 수술 후에는 아마 삶을 정리하셔야 할 거예요."
"그렇군요. 끝이 보이는 상황이네요."
"그렇죠. 준비된 끝이 있겠냐만. 이제는 준비를 하셔야 할 정도의 상황이에요."
"말씀 감사합니다. 그동안은 비슷한 경우에 원무과 직원분들 하고만 이야기를했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직접 이런 말씀 해주시는 건 처음이네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저도 원래는 이런 일까지 안 엮이려고 원무과 통해서 진행하는데. 보호자 없이 가시는 분들 보면, 저도 괜히 마음이 좀 그래서. 공무원 선생님도 바쁘실 텐데,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의사는 돌아서서 의사 가운을 휘날리며 자기 갈 길을 갔다. 별 내용은 없는 대화였지만. 고마웠다. 부끄럽기도 했다. 그리고 짜증 난다. '난 잘못 없어. 의사 너 인마 돈을 많이 버니까 그런 것도 따지는 거야. 저놈도 고생을 해봐야 알지.' 이 정도 생각이 떠오를 때쯤 머리가 아팠다. 큰 병원인데 어디 바닥에 타이레놀 떨어진 거 없으려나.
부끄러워서인지, 진짜 바닥에 떨어져 있을 타이레놀을 찾는 건지 바닥만 보며 병원에서 나온다. 날씨가 좋다. 고통과 시름의 전당인 병원에서 멀어지고 햇살을 마주한다. 그래. 좋은 일만 남았다. 오늘의 두통은 좋은 징조다. 원래 나쁜 일이 있으면, 바로 다음에는 좋은 일이 생긴다. 기세를 몰아서 이계성 할머니 일만 어떻게든 털어내자. 그리고 새출발을 하자. 이계성 할머니가 준 임무의 핵심인 공책을 가지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면 된다. 이번 심부름을 해결하고, 이계성 할머니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요양병원으로 할머니의 주소지 이전시킨다는 계획을 떠올린다. 제법 완벽한 계획이다.
이계성 할머니 집으로 가기 전에 먼저 주민센터로 가자. 이계성 할머니 집에 대한 이사비 지원, 병원비 지원 등을 최단 시간에 추진할 수 있도록 사전작업을 해두어야 한다. 그렇게 이계성 할머니 일을 해결하면, 난 박 여사에게 당당히 집 계약 갱신 요구만 하면 된다. 그러면. 된 거다.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