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못 끊을 것 같다.
3화. 보이지 않는 풍경
- 각 작품은 각기 다른 이야기입니다. 뭐랄까. 멀티 유니버스 같은 거죠. -
“이쯤 하면 됐지 뭘 더 가지고 오라 그래! 동장 당장 튀어 나오라 그래!”
고성이 들린다. 요새 들어 고성이 더 자주 들리는 것 같다.
“불편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저희도 해드리고 싶은데 법이 그래서 어쩔 수가 없어요. 추가 서류만 가지고 오시면 되니까. 가지고 오시면 바로 해드릴게요.”
민원창구 직원 A는 나름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슬슬 욕설도 들리기 시작한다. 상황이 악화 되는 것 같다. 나의 자리는 민원 창구 바로 뒤편에 있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을 외면하기가 어렵다. 결국 나는 일어나 민원 창구로 나가본다. 세상이 뭐가 그리 미운지 삿대질과 고성을 난사하고 있는 민원인 옆에서 관련 내용을 직접 안내해본다. 물론 설명은 의미가 없다. 그저 누구 하나 더 나와서 자기 말을 듣는다는 느낌을 민원인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기에 직접 나갔을 뿐이다. 그래야 문제가 빨리 끝난다. 물론 해결이 아니라, 그냥 마무리 되는 것 뿐이지만 이게 그나마 정신건강에 더 좋다.
“XX 같은 XX들. 일을 뭐 이따위로 해 XX”
기억도 안 날만큼 옛날이지만 욕설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무서웠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규정대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요.”
욕설과 고성 다음 단계인 일장연설이 시작된다. 요약 해보면 공무원은 글렀다는 내용이다. 멍하니 듣다가 A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A가 6개월 전 신규직원으로 채용되어 이곳으로 발령받은 직원이라는 점 외에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내 일도 급격히 바빠지다 보니 A와 대화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
A는 20대 중후반이나 되었을까. 참 앳되어 보였다. A는 공무원 시험 합격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시험에 합격하고 A는 얼마나 즐거웠을까. 그리고 A는 지금 얼마나 힘들까. 다행히 A는 ‘미소를 머금다’ 정도로 묘사 가능한 표정으로 민원인의 분노를 받아내고 있다. A는 추가 서류가 왜 필요한지 민원인에게 한 번 더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들은 것만 6번째인데 매번 친절한 어투를 유지한다. 참 굳건한 친구이다. 결국 나는 달리 이곳에 있을 존재가치가 없기에 민망해진다. 별 수 없이 나는 다시 민원창구 뒤편에 있는 나의 자리로 향한다.
민원창구 밖에서 바라본 주민센터의 모습은 참 정갈했다. 다들 무덤덤하게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슈퍼 프로페쇼날 하다고 해야 할까, 무감각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기계 같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다들 참 지천에 깔린 월급쟁이들과 같이 일이라는 걸 어기어차 하고 있었다. 민원창구 밖에서 보이는 주민센터의 모습에 문득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바로 곁에서 소동이 일어났어도 이들은 참 침착하게들 자기의 일들을 해내고 있다. 한 아주머니가 암살자처럼 신속하고도 조용히 내 곁에 다가왔다. 나는 이렇게 암살 당하는 걸까.
"여기 직원이죠? 저 아저씨 좀 이상한데. 경찰에 대신 신고해드릴까? 직원이 직접 하기 민망하잖아. 저거, 저거 직원한테 너무 하잖아. 저 여자 직원 내 딸 같아서 그래."
어떻게 해야 할까.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러본다. 참 기이하기도 하다. 공무원은 안 되는 일을 안 된다고 하면 욕을 먹게 된다. 예전에 한 드라마에서 궁녀들 간에 요리 재료 맞히는 경연 장면이 기억났다. 한 꼬마 궁녀가 요리를 먹고 홍시 맛이 난다고 했다. 심사위원이 왜 홍시 맛이 나냐고 물었다. 꼬마 궁녀는 울먹이며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했습니다." 라고 했다. 왕과 심사위원은 이에 허허 웃으며 호평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는 누군가가 "왜 안 된다는 게냐."라고 물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 것이옵니다."라고 답하면 "어디서 싸가지 없이!"라는 답을 듣는다. 드라마 속 왕이 속없이 착한 인물이었던 걸까. 망상은 접어두고 암살자 아주머니에게 답을 한다.
"아닙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무런... 문제가요."
나 스스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을 하다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상한 현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문제가 없어야만 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우리의 오늘들은 참 홍시 같은 게 되었음을 느낀다. 암살자 아주머니는 안타까웠지만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불쾌감을 벗어나고자 주민센터 밖으로 향했다. 나는 이런 비현실적 현실에 놀라 이게 맞나 싶어서 다시 민원 창구를 보았다.
민원창구 뒤편에서 바라본 A는 손을 떨고 있었다. “물론 번거로우시겠지만 이 서류가 필요한 이유는요!” 영화관 입구에서나 들었을 것만 같은 맑은 톤의 목소리였지만 A는 손을 떨고 있었다. 그 장면을 봐서인지 모르겠으나 A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내가 그걸 몰라서 이래? 답답하게 구네. 나도 일 해본 사람이야.” 처음에 민원인은 수긍한 듯 보였으나 다시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다시 나의 자리에서 일어나 민원창구 직원 쪽으로 향했다. 실제 내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나의 얼굴을 들이밀고 안내하면 조금이라도 언성이 낮아질까 싶어서였다. 이럴 때는 노안인 내 얼굴이 참 좋다. 단점이었던 나의 늙은 얼굴이 이렇게 종종 도움이 되기도 했다. 얼씨구나 참 좋다. 심호흡을 하고, 삿대질을 하고 있는 민원인에게 다가 가서 말을 건다.
“선생님, 아까 말씀 드렸듯이...”
“아. 주임님 저기...” A가 나를 조심스럽게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조용히 나에게 말했다.
“주임님! 제가 할게요! 제 일이잖아요!”
아차 싶었다. 내가 괜한 참견을 했나 싶어서 자리로 돌아왔다. A는 다시 밝은 목소리로 안내를 시작했다. 물론 안내의 첫 마디는 ‘죄송하지만‘이었다. 좀 갑갑해졌다. 숨도 잘 안 쉬어지고 머리도 터질듯이 아파왔다. 건강이 안 좋아진 걸까. 살을 빼야겠다. 담배도 끊고. 술은... 못 끊겠다. 민원창구 뒤 내 자리에서 A를 다시 바라보았다. A는 손을 여전히 떨고 있었다.
“일을 똑바로 하란 말이다. 일을! 멍청하게 일을 하니 공무원밖에 못 하지.”
그렇게 고성, 욕설, 삿대질, 일장연설이라는 단계를 성실히 이행한 민원인은 신청서를 찢고 주민센터 밖으로 나갔다. A는 한숨을 조용히, 아주 길게 내뱉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자리를 비웠다. 기다리는 민원인들이 많았다. 도움이 될까 A의 자리에 앉아서 다음 대기 민원인을 응대하려 했다. 물론 내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업무 보러 오셨냐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A가 해야 할지도 모르는 감정노동이라도 해주려고 A의 자리에 앉았다.
A의 책상 위에는 조급함에, 혹은 공포에 사로잡혀 A가 뜯었는지 뜯어진 손톱도 흩어져 있었다. 관련내용을 찾기 쉽게 포스트잇으로 이곳저곳을 표시해 둔 업무 지침도 있었다. 아침에 잠을 깨기 위해 마시려고 샀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있었다. 다만 한입도 못 마셨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녹아 테이크아웃 잔을 넘기기 직전의 수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A의 책상 위에는, A가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 있었다. 사진의 뒷면에는 ‘사랑하는 울아빠♡울엄마’라고 적혀있었다. 가족사진은 참. 따뜻했다.
내가 본 풍경은 민원창구 건너편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전입담당 주무관 A가 아니라 참 착하게도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 임유정'의 풍경이었다.
내가 A의 자리에 앉은 지 140초나 지났을까. A는 그새를 못 참고(정확하게는 못 쉬고) 눈시울이 붉어진 채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A가 민망해 할까 나는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A 앞에 선 다음 민원인은 "왜 이렇게 오래 기달리게 해요!" 라고 했다.
이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는 술은 못 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