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오랜만에 놀러 온 봄비와 봄바람을 맞이하는 날이면, 옷 속으로 스며드는 찬기에 얇아진 옷깃을 다시 여미곤 한다.
하지만 비 온 뒤에 찾아올 다정한 봄 햇살이 기다려져 다시금 설레기 시작하고, 어느샌가 촉촉한 봄비를 머금고 파릇파릇 연한 옷을 입고, 수줍게 내미는 나뭇잎과 꽃봉오리들이 하나 둘 기다려진다. 어쩌다 성질 급한 녀석은 봄햇살에 급속 충전이라도 한 듯, 귀엽고 어여쁜 소중한 꽃잎을 활짝 펼쳐 보인다. 길을 가다 그런 녀석이 하나라도 눈에 띄기 하도 하면,
‘어머, 어머~~ 이거 봐. 너무 예쁘다.^-^~ 봄은 봄인가 봐. 며칠만 더 지나면 여기저기서 마구 피어나겠지!’
몇 발자국 더 나아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곧장 설렘 한 사발을 달콤히 들이켠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파릇파릇하고 알록달록하게 피어나는 꽃과 나무를 그려보느라 다른 것엔 집중할 여지가 없다. 이 맘 때, 촉촉하게 땅을 적시는 봄비가 내리면, 비에 젖은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스멀스멀 코끝을 자극한다. 계절을 알리려는 자연의 노력이 아닐까. 그 노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뿌듯하기도 하다.
나의 남편은 자연의 변화에 그다지 관심도 없고, 무딘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완전한? 집돌이었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를 느낄 껀덕지가 없지 않았을까. 적어도 5년 전쯤에는 말이다. 신혼 초엔 길가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잡초나 야생화를 보며 감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연을 좋아하는 나의 감성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 음… 이건 나의 입장에서 본 의견이니, 그의 생각이 다르다면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봄에 피는 꽃은 그저 벚꽃, 아니면 개나리, 진달래 정도였을까? 사실 진달래의 이름도 몰라서 내가 알려줬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점점 남편이 변해간다. 중년의 나이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인 건지, 아니면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나의 영향인 건지.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나보다도 감성충일 때가 종종 있어 놀라곤 한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풀을 보며, 콕 집어 말한다. ‘오, 이거 봐, 여보. 너무 귀엽지 않아?’ 감탄하며, 앞서 걸어가는 나의 발길을 멈춰 세우는가 하면, 목련나무의 앙증맞은 꽃봉오리가 귀엽고 신기하다며,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고 직접 만져보기까지 한다. 꽃봉오리의 보들보들한 촉감이 '몽돌이(우리 집 고양이다) 털 같다'며 아이처럼 놀라워한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건 목련이야~'라며 이름을 말해주고, 그를 따라 보송보송 잔털이 올라온 말랑한 꽃봉오리를 살그머니 만져본다. 내가 가끔씩 말해주는 꽃이나 나무의 이름을 귀담아 듣는지는 모르겠다. 반복해서 말해주다 보면 언젠가는 기억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해 주곤 한다.
점점 깊게 새겨지는 이마의 주름처럼, 한층 깊어지고 풍부해진 남편의 감성을 보고 있자니, 함께 기분이 좋아지고, 대화거리가 생기고, 웃음이 터진다. 얼마 전에는 공원에 부러져있는 나뭇가지를 주워와서는 가지를 똑똑 부러트려 다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오, 나뭇가지 모양이 예쁘다~ 표면도 매끈하네~'라며 관심을 보였다. 남편은 ‘그렇지, 나뭇가지 모양이 정말 예쁘지? 미니어처 나무 같지 않아?’ 하면서, 나뭇가지를 소중히 가지고 있다가 집으로 데리고 왔다. 지난겨울에는 길가에 널려있는 이런저런 나뭇가지와 나무열매를 모아서 겨울 장식 리스도 만들었던 그였다.
나보다 오히려 더 세세한 것에 감동하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귀엽고 뿌듯? 하기도 하다.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의 영향으로 조금씩 비슷한 것을 보고 느끼는 포인트들이 늘어나다 보면, 서로 공감하며 소통하는 모습도 많아질 테니 말이다. 이래서 오래 같이 살다 보면, 서로가 닮아간다고 하나보다. 사실, 외모는 안 닮고 싶은데... 이미 닮아가고 있는 듯하다. 뭐... 이제와 어쩌겠는가. 가장 많이 보고, 이야기하는 상대가 남편인데 말이다.
나는 요즘, 남편과는 반대로 풍부했던 나의 감성이 좀 줄어드는 것 같다며, 씁쓸함을 머금고 내뱉곤 한다.
나의 20대~30대를 돌아보면, 나란 사람은 소소한 것에 감탄하고, 고요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공원에 앉아 사색에 빠지기도 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계절의 향기에 취해 마음껏 느끼고, 변화하는 순간순간에 집중해 그것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그때는 오롯이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때였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그것을 배우고, 나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고, 나의 변화와 성장에 초점을 맞춰, 나의 생각과 감정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날들이었다.
봄에는 남산둘레길을 걸으며 파릇파릇 연둣빛 물이 오른 반짝이는 나뭇잎을 사랑했고, 빽빽한 돌담 사이로 삐죽 올라와 노란 얼굴을 활짝 내민 민들레와 기다란 줄기를 타고 내려온 이름 모를 풀을 보며 감성에 빠지곤 했다.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한 남산도서관과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엔 봄이면 오래된 벚꽃나무가 만발하고, 화단에 심어진 다양한 꽃들은 계절마다 다른 향기로운 옷을 입고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소복하게 떨어진 벚꽃 잎은 바람에 날아가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수줍음을 머금은 하늘하늘하고 부드러운 바람처럼 느껴졌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그 순간에 몰입해 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매일 같은 곳을 가도 지겹지 않았던 이유는, 매일매일 다르게 보이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의 여유로운 삶은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시간이었기에 그 순간들을 더욱 즐기고, 나를 깊게 느끼며 살아가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내 곁에는 늘 남편이 있고, 새로 생긴 서로의 가족들과 관심을 주고받아야 하는 환경이 되었다. 혼자일 때와 둘일 때의 차이다. 본래의 나는 한 번에 여러 곳에 에너지를 쓰지 못하고, 한 가지에 몰입하는 성향이 강한데, 나의 한정된 에너지를 여러 곳에 나누어 써야 하다 보니, 그것들이 대부분 깊이가 덜하고, 서투른 모습을 보인다. 내가 아닌 주변의 상황들, 감정들을 신경 쓰면서 살아가다 보니, 뚜렷했던 나의 모습이 뿌옇게 가려지도 한다. 혼자일 때는 불안정한 삶에서 중심을 잡아가며 나에게 집중해 살아갔다면, 둘이 되어서는 서로가 지켜준다는 안정감을 갖게 된 반면, 나의 에너지를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 여러 곳에 써야 하기에 나 자신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 것이다. 나만이 아닌 우리를 생각하고 나누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내 인생에 빠져 풍부한 감성을 느끼던 때와는 달리, 점점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 부분이 많아진 것이 아닐까.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다.
그간 잊고 지냈던 감성도 아니고, 사려져 버린 감성도 아니다.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씁쓸함 맘을 머금었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몇 개월 전, 친언니와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언니에게 '내가 요즘 감성이 좀 줄어든 것 같다'라고 말했지만, 여행의 시작과 동시에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여행의 기쁨에 환호성을 지르고, 날씨에 감탄하고, 사람과의 만남에 감동하고, 작은 것 하나하나에 숨길 수 없는 감정들이 툭툭,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내가 감성이 줄어들었다 느낀 것은, 그저 그 순간들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던 것이다. 나를 둘러싼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보지 않고, 그 순간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되자, 나의 본모습들이 날개를 펴고 신나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무튼, 이제는 안심이다. 나의 소녀소녀한 감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되었다.
오늘의 글쓰기를 통해, 나에 대한 희망을 하나 발견한 기분이다. 나의 감성 나이가 몇 살은 더 젊어진 기분이랄까.
소소한 것에 시선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고, 향기를 느끼고,
행복한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은
내가 하기에 달린 것이니.
나의 마음과 생각을 조금씩 비워내고,
여백을 만들어가며 지금을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