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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woo Kim Mar 09. 2024

시간을 나는 드론 (7)

백제와 마한을 추억하며 (3) - 한성 백제의 끝

한강과 금강 사이


무왕의 금마 천도는, 아마도 사비에서 발생한, 4대에 걸친 왕의 암살에 대한 대응책이라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나 여러 번 암살사건이 발생하면, 당연히 왕실과 호족 또는 귀족계층 간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을 것이고, 왕실은 주변 귀족세력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왕의 시해는 당연히 왕궁에서 발생했을 것이니,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다른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도는 쉽지 않다. 단순히 건축할 것이 많아서가 아니다. 어디로 가는지에 따라 귀족 간 역학관계가 달라진다. 또한, 웅진과 사비 모두 금강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벌포(현재의 장항)와 당 사이 교역로가 이미 정착되었을 수도 있다. 행정과 군사 명령체계도 금강 수운과 기벌포 중심 해운으로 짜여져 있었을 것인데, 그걸 다 바꿔야 한다. 그 어떤 역사서에도 웅진에서 사비로의 천도 이후, 또 다른 천도가 기록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통칭하여 "백제"로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아는 백제는 거의 항상 "한성백제"였다. 그것은 "한성"을 빼앗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웅진과 사비 일대는 한성백제가 태동하던 시절부터 마한의 많은 국가들이 자리잡아 왔었고, 이들이 그대로 백제국의 호족이 되었다. 어느 순간 그들의 지역은 수도가 되었고, 그대로 중앙귀족 혹은 왕실을 위협할 만한 강성한 호족세력이 되어버렸다. 


충청권의 지형을 보면, 강의 지류가 많고, 동시에 꽤나 험준한 산세가 거미줄처럼 퍼져있다. 그 사이사이에 적당한 크기의 평지가 위치하며, 이들은 모두 작은 세력이 자리잡을만 하게 보인다. (실제 현대에도, 그런 지역마다 지역 거점도시가 형성되어 있고, 그들 대부분 역사가 꽤나 깊은 도시들이다. ) 그들 중에 큰 강에 면하거나, 평야라 불릴 만큼 생산력이 지대한 땅이거나, 혹은 바다를 끼고 만을 형성하거나 할 만한 곳에는 후대까지 이름을 남긴 마한의 국가들이 자리했다. 


한강 유역에서 남쪽을 향하면 바로 이 충청권의 수많은 마한 국가들이 자리한다. 목지국을 위시한 수십개 크고 작은 고대 국가들이다. 한성백제가 제아무리 강성해져도, 이들 모두를 깨부수고 확장하는 것은 어렵다. 바로 북쪽에 한사군, 그리고 그 이후 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성백제 시기 내내, 충청권에 위치한 많은 마한 국가들에게 위세품을 보내며 외교적 수단으로 그들을 관리했던 것이 그 때문이다. 


험준한 산세로 가득한 충청권을 지나면, 바로 금강이 나온다. 이 금강을 끼고, (충청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규모 있는 평야지대가 위치하며, 상류의 대전부터 하류의 서천(기벌포)까지 이름을 남긴 많은 마한국가들이 위치했다. 상류지역은 또한 가야 권역인 섬진강 상류가 가깝고, 실제로 현재의 금산과 남원(아막성)까지 마한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대가야의 권역이기도 했고, 훗날 가야계와 백제가 교류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대가야 강역도. 한성백제가 본격적으로 금강유역을 관리하기 이전의 상태로 보인다. (고령 대가야박물관)


금강을 넘어 사비와 금마로 


한강 유역에서 출발하여 옛 마한 지역을 지나면 금강이 나온다. 그리고 그 금강 유역을 경계로, 산지와 평야가 나뉜다. 북쪽은 차령산맥의 끝자락이 자리하고, 남쪽은 김제평야로 시작되는 호남평야다. 너른 평야를 통과하다보면 만경강을 마주하고, 다시 김제평야를 지나면 동진강이 나온다. 동진강을 건너면 바로 험준한 산지를 마주하는데, 이것이 노령산맥이다. 이 산맥을 경계로 남쪽은 영산강 유역이 자리한다. 


지리적인 이유로, 한성백제는 차령산맥 너머의 세력에 대하여는 충분한 밑작업(?)을 해놓지 못한 것 같다. 기껏해야 금강 유역, 특히 금강 상류와 섬진강 상류에 자리한, 대가야와 마한의 교차영역까지 관리를 했던 것 같다. 한성백제가 강성해진 이후, 기존 마한국 중 대표국가들 대부분은 한성백제와 대립했다. 안성평야부터 금강수계에 이르는 지역을 그들의 영역으로 보긴 하지만, 대표국들의 위치는 지금의 안성과 아산 지역에 위치했다. 차령산맥을 넘기 전의 지역이다. 


강성했던 한성백제와 직접적으로 맟닿지 않으면서, 금강 수계와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금강 유역에 위치한 마한국들은 비교적 자유로이 성장했을 것이다. 이들의 힘은 3-4세기 목지국과 같은 마한 종주국에 비견할 만 했을 듯하다. 한성백제에 대항할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쫓겨온 구 한성백제 왕실을 상대로는 무척이나 강력한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이었다. 게다가 웅진과 사비, 기벌포 등 금강 수계로 이어진 세력들은 금강 수계를 통해 오랜 시간 교류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일종의 연합세력으로 움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웅진으로 쫓겨온 백제왕실은, 웅진 지역의 호족만 견제해도 힘에 부쳤을 것이다. 애초에 근거지를 통채로 잃은 직후였고, 그들이 수백년간 교류해 오던 지역도 아니었으며, 따라서 왕실의 모든 결정과 행동이 주변 호족들의 지원 없이는 아예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웅진 호족만이 적이 아니었다. 금강 수계에 자리한 모든 호족들이 웅진 세력과 긴밀한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는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웅진은 알려진 바와 같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그러나 그 주변이 넓지 않고 바다와 멀다. 호족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하지만, 여러 호족을 아우르는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한성백제 시절, 당과 교류하던 것을 감안하면, 웅진은 더더욱 한성백제 왕실의 수도로 기능하기 어렵다. 풍납토성과 명활산성의 이성체제 수도를 운용했던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웅진 이외 평지성을 개척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진다. 


문제는,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왕실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후기백제의 대부흥을 외친 성왕은 한성수복전에서 전사한다. 한성수복전을 꾀할 만큼 백제의 국력이 다시금 신장되었다는 뜻이고, 동시에 강해진 국력만큼 왕실의 안위도 한층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왕의 전사 이후 왕들의 암살은 그렇게 신장된 왕권이 다시금 바닥을 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왕권의 신장도, 국력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일단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가깝지만 먼 금마


빨간 원이 금마(익산왕성), 파란 원이 사비(부여), 초록색 원이 웅진(공주), (지도출처: 애플맵)


직선거리만 보면, 금마왕성의 위치는 사비와 웅진 등 기존 금강유역에서 그리 멀지 않다. 게다가 기벌포까지 수운으로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그 거리는 훨씬 줄어든다. 게다가 사비에서 출발하면, 금마까지는 온통 이동하기 편한 평지다. 대충 보면, 금마로의 이동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지형을 자세히 보기 시작하면, 기분이 묘하다. 각 도시의 입지를 보면, 그곳에 군주들 혹은 당대 지배층의 마음이 읽힌다. 웅진의 공산성은, 북쪽은 깊은 금강 중류가 빠르게 흐르고, 남쪽과 동쪽, 서쪽 모두 꽤 험준한 산지가 둘러싸고 있다. 평지는 거의 없다. 공산성 내부도 왕성이라기에는 협소하다. 백제로의 성장을 포기하고 온전히 목숨만 부지해서 피난 온 문주왕의 흐느낌이 읽힌다. 사비는 북과 서, 남쪽을 금강이 휘감아 흐른다. 동쪽은 산지가 가득하다. 그러나 사비 지역은 온통 평지다. 금강 건너편도 평지가 많지만, 곳곳에 그리 낮지 않은 구릉이 강에 가깝게 면한다. 강의 양쪽에 군사를 배치하면 수로로 들어오는 병력을 손쉽게 견제할 수 있다. 또한 웅진과 다르게 수도로서 기능할 만한 대지와 생산력도 갖췄다. 비록 비극으로 끝났지만, 성왕의 눈빛이 엿보인다. 

 

그런데 금마는 새롭다. 한성백제는 물론이거니와, 금강유역 호족들도 수운에 크게 의존했다. 그 당시 수운은 지금보다 그 중요도가 훨씬 컸다. 물자 뿐 아니라 군사와 인간의 이동 모두 수운이 제일 빠르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마는 수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주변은 온통 평야다. 북쪽과 동쪽은 험준한 산지로 막혀 있다.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북쪽에는 금강이 있다. 게다가, 가까운 북쪽은 만경강이, 남쪽은 동진강이 금마를 지킨다. 사비에서 금마로 가는 가장 빠른 육로는, 금마 직전에 협곡을 만난다. 협곡은 적은 군사로 방어하기 좋은 지형이다. 여기가 막히면, 서쪽으로 크게 우회해야 한다. 사비를 떠나 금마로 이동한 무왕이 금강 지역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려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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