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아버지는 300여 마리의 병아리로 양계장을 시작했었다. 양계장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닭이 죽어 나왔는데, 이렇게 죽어 나오는 닭들은 반찬이 되어 우리 밥상에 올라왔다.
집에는 우리 식구 7명에, 일하는 식구가 3-4명, 늘 10여 명이 살았다. 많은 수의 사람에게 닭을 먹이기 위해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닭국이다. 닭으로 국물을 내어 여기에 잘게 찢은 닭고기와 파를 넣고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먹었다. 운이 좋게 국에 가슴살이 들어있으면 좋은데, 가끔은 껍질이 붙은 고기가 들어 있었다. 나는 국에 들어있는 닭껍질을 좋아하지 않았다. 굽거나 튀긴 닭과 달리 멀건 국에 든 닭껍질은 느끼하다. 슬쩍 건져 밥그릇에 놓았다가 아버지에게 걸리면 아까운 고기를 버린다고 혼이 나곤 했다.
어려서 먹던 닭은 육계용이 아닌 산란용 닭들이었기 때문에 고기가 뻣뻣하고 질겼다. 하지만 다 자란 닭이기 때문에 한 마리만 잡아도 양이 푸짐했다. 요즘 미국에서 파는 닭, 특히 ‘피스’ 로 파는 닭고기는 너무 어린 닭을 잡는 것 같다. 어떤 것은 다리가 내 손가락보다도 작다.
양계장 일을 돕는 식구 중에 나보다 나이가 2-3살 많은 ‘영달’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 집까지는 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아침저녁으로는 누이를 자전거에 실어 선일 국민학교에 등하교를 시켜주고 낮에는 양계장 일을 도왔다. 늘 집에 있는 나의 친구 노릇도 해 주었다.
병든 닭을 잡는 일은 영달이의 몫이었다. 하루는 그가 나의 장애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인즉, 병이 들어 일어서지도 못하던 닭의 목을 칼로 내리쳐 자르는 순간 목이 잘린 닭이 벌떡 일어나 걷더라는 것이다. 목을 다시 붙일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나도 같은 방법으로 걸을 수 있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웃어넘겼지만, 그 일은 두고두고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전신 장애인의 목을 잘라 죽은 사람의 몸에 이식하는 시도가 내년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영달이가 40여 년 전에 알았던 사실이 이제 임상실험을 앞두고 있는 셈이다. 어디서 무얼 하고 사는지 모르지만 혹시 그 기사를 보고 나를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벽제로 이사를 한 후 본격적으로 양계를 하게 되니 죽어 나오는 닭의 숫자도 늘어났다. 닭을 삶아 살을 바르고, 잘게 다진 야채, 쌀과 마늘을 넣고 닭죽을 끓여 팔기 시작했다. 때마침 ‘마이카’ 시대가 열려 주말이면 교외로 차를 몰고 나오는 이들이 늘어나며 닭죽의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제과점에서 받아 온 빵과 커피까지 곁들여 휴게실이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그 휴게실이 훗날 벽제갈비가 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버지가 술 한잔 걸치고 집에 오는 길에 사다 주는 통닭을 먹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와 내 동생들은 아버지 대신 누나가 사 주는 통닭을 먹었다. 군에서 예편한 후 주로 집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저녁시간에 어디 외출하는 일도, 술을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피아노를 전공하여 성악이나 기악을 하는 친구들의 반주를 해 주었던 누나는 가끔 용돈이 생기면 우리들에게 빵도 사주고 통닭도 사 주었다.
미국에 오던 해의 일이다. 처음 몇 달을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나오던 날 밤이었다. 몇 가지 짐을 옮기고 4살 된 아이를 데리고 저녁을 사러 나왔다. ‘켄터키 치킨’을 사 가지고 나오는데, 제법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이에게 춥지 않으냐고 물으니 "아빠랑 같이 있으면 춥지 않아"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코끝이 찡해 왔다. 난 그날 ‘내 결코 이 아이를 춥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했었다. 과연 나는 살아오며 그날의 약속을 제대로 지켰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