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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기본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넷에 '글 잘 쓰는 법'을 검색했는데 논술 포스팅이 많았다. 당시 인문학이 유행이어서 이어령, 이오덕, 유시민 등 작가들의 글쓰기 팁을 엮은 포스팅이 주류였다. 다시 봐도 알짜다. 하지만 핵심만 모아서 그런지 글쓰기의 전반적 흐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글쓰기 전체를 아우르는 정보가 필요했다. <힘 있는 글쓰기>는 돈 주고 산 첫 번째 책이다.
피드백과 퇴고의 중요성을 배웠다. 문제는 그것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다. 끝까지 읽지도 않고 글쓰기에 들어갔다. "피드백을 부탁합니다.", "자신의 글이 읽히지 않는 것을 언제까지 참고만 있을 것인가!", "자유로운 글쓰기를 실천해라!" <힘 있는 글쓰기>는 내가 독서를 하지 않고 글쓰기를 시작한 원흉이자 스승이다.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6년 전 남겨둔 부분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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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있는 글쓰기>를 완독 한 영향일까? 다른 글쓰기 책은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같은 글쓰기 책인데도 너무나 달랐다. 피터 엘보는 작문법 기초부터 두루두루 다뤘는데 스티븐 킹은 창작의 관점이었다. "소설은 재능인가."라는 의문을 남긴 책.
나는 상식과 지식이 없다. 없다는 걸 인정하니까 최악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데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안 읽었다면 스티븐 킹과 스티븐 호킹이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저자 이름이 익숙했는데 스티븐 호킹을 떠올렸던 게 분명하다. 스티븐 킹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지인에게 영화 <그린 마일>을 여러 번 추천했다. 나는 안 봤지만 <쇼생크 탈출>이 얼마나 유명한 작품인지는 안다. 심심풀이로 봤던 <캐리>도 스티븐 킹의 작품이었다.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확실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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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결심한 후 도서관 첫 방문. 의욕이 충만했다. <종의 기원>은 표지가 고급스럽고 지적 허영에도 좋아 보였다. 연습 삼아서 1시간 정도 읽었다. 40페이지 정도 읽었는데 이 책은 656페이지였다. "16시간이면 읽겠네?" 도서관 회원증이 없어서 다음 날을 기약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책의 표지가 아른거렸다.
다음날. 회원증을 만들자마자 도서관에 익숙한 척하며 <종의 기원>이 꽂혀있던 책장 앞에 섰다. 만족스러운 질감. 그런데 뭔가 아쉬웠다. "이것만 빌리면 내일이나 모래 또 와야 하잖아?" 잠시 미쳤던 것 같다. 겸사겸사 대여한 책이 <유혹하는 글쓰기>다. 이 녀석이 2번인 이유는 1번은 준비운동이라고 생각해서다. 이 책이 1번이었다면 지금 이 글은 없었을 것이다.
<유혹하는 글쓰기> 완독 후, 독서 의욕은 위험수위였다. <종의 기원>을 1시간 정도 읽으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 끝까지 읽는다고?" 대출 전에 읽었던 부분은 옮긴이의 말, 즉 예고편이었다. 본편은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낯선 지명, 정체불명의 생물들, 가독성을 떨어트리는 번역어투. 며칠을 고통받으며 읽었다. 그것은 독서가 아니었다. 그래도 버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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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은 쇼크였다. 치유가 필요했다. <사람은...>은 삽화도 있었고 내용이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이 글에 적힌 여섯 권 중 하나를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이 책을 고르겠다. 뇌과학은 나를 논리적으로 위로해 주었다. 감수성과 공감능력이 낮은 나에게 좋은 선택이었다. 내용도 알차고 설득력이 있었다. 이 책을 학창 시절에 봤어야 했다. 공부를 못했던 이유를 재능이나 환경에서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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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확행 인문학 관찰 에세이. 솔직히 5번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가 어려울 것 같아서 얇고 쉬워 보이는 이 책을 같이 빌렸다. <종의 기원>을 읽기 전에 <유혹하는 글쓰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예방 접종은 만족스러웠다. 이것이 경험의 힘인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에서 배웠던 기억 속 랜드마크, 그리고 지식의 네트워크를 떠올리며 읽었다. 이제부터 프랑스라는 단어를 보면 이 책을 떠올릴 것이다. 아직은 지식이 부족해서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는 없겠지만 머릿속 한 구석에 랜드마크를 만들고 연결할 준비는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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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추천도서 40선'이라는 포스팅을 보고 선택한 책이다. <종의 기원 : 시즌 2>가 돼버린 책. 읽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시민은 대중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검색을 해보니 나의 잘못이었다. 그의 추천은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책'이었지 독서하기 좋은 책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시민이 추천한 책'이라며 앞다투어 홍보했다.
구글에 서평을 검색하면 가장 위에 나오는 것이 18년 전 글이다. 검색 결과에 ₩500, ₩2000 같은 숫자가 많았다. 독후감 리포트 수요가 많은 모양이다. 독서를 하든 안 하든 대중의 객관적 수준은 존재한다. 내가 볼 때 이 책을 소화하는 학생은 흔하지 않다. 토익 400점도 안 되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원서를 보라던 대학시절 교수가 떠올랐다.
"개인의 희생은 단체의 의기주의가 된다." 책의 메시지를 의심할 생각은 없다. 어려운 어휘가 많아서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이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르라고 조언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나의 배경지식과 독서경력으로는 턱 없이 모자란 선택이었다. 읽어냈다는 성취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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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할 책을 고르며 훑어보던 중 '스티븐 킹'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읽은 책 저자를 다른 책에서 목격한 첫 경험! 안 읽을 수가 없었다. 7번 책이 두꺼웠기 때문에 충격 완화 목적도 있었다. 나의 독서는 롤러코스터가 되는 것 같다. 기대만큼 얻은 것은 없었다. 강의 같은 구성이어서 배경지식이 부족한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소설이 재능이 아니라는 단서도 얻었지만, 차라리 재능이라는 말이 희망일 정도로 어려웠다. 의욕보다는 좌절이 많은 독서였다. 독서 목적이 소설가였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을 많이 읽어봐야겠다고 느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소설이 0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