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도로 표지판들
막히는 길이 아닌데 웬일인지 차들이 줄지어 멈춰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하고 앞을 유심히 보니 저 멀리 길을 건너고 있는 오리 가족이 보였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 오리들이 뒤뚱뒤뚱 엄마 뒤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고 차들은 가만히 멈춰서 안전하게 오리들이 길을 건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원이나 물가가 있어서 오리가 많은 지역 근처에는 어김없이 오리 가족이 그려진 표지판이 도로에 서 있었다. 표지판이라고 하면 경고나 금지의 목적으로 주의를 주는 다소 딱딱하고 위압적인 소통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뉴질랜드에서 만나는 표지판들은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도로 표지판이 거기서 거기겠지…’ 어딜 가나 국제 규격으로 비슷한 도로 표지판이 있는 줄 알았건만, 사진을 찍고 싶어서 차를 멈춰 세울 만큼 수집 욕구가 드는 표지판도 있다는 걸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우연히 차를 몰다 마주치면 괜스레 미소 짓게 했던 뉴질랜드 표지판 3종류를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는 뉴질랜드가 얼마나 동물친화적인지 느끼게 했던 동물 주의 표지판이다. 목장 주변 도로에는 몽글몽글한 털을 가진 양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습지 근처에는 유유히 걸어가는 푸케코가, 통가리로 국립공원 근처에는 뉴질랜드의 대표 동물인 키위가, 또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 근처에는 호기심 많은 케아 앵무새가 표지판에 그려져 있다. 주변에 이런 동물이 살고 있으니 주의를 살피며 천천히 운전하라는 의미인데, 이 표지판들 덕분에 이곳이 어떤 특성의 지역인지,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실제로 케아 앵무새 표지판을 보고 차를 멈춰서 짧은 등산 트랙을 걸었는데, 캠핑카 위에 올라가서 놀고 있는 케아를 만났다. 케아는 마오리 이름인데, 날아오를 때 “키-아아아!” 하고 소리를 질러서 마오리족이 ‘케아(Kea)’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우렁찬 울음소리만큼이나 겁이 없고 장난기가 많아서 자동차 와이퍼를 분리해서 가져가고, 가방을 열고 과자를 꺼내가고,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와서 카메라나 전자기기를 구경하고 가기도 한다. 우리가 만난 케아 역시 캠핑카 위에서 무언가를 뜯으며 놀고 있었고 사람들이 몰려들어도 꿈쩍도 안 했다. 표지판 속 동물들이 실제 하는 것을 넘어 이 땅의 주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사람과 차 중심의 도로 표지판에서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뉴질랜드가 얼마나 동물을 가까이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소, 사슴, 펭귄, 달팽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 표지판을 찾는 재미도 있고, 표지판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보며(나 포함) 표지판 자체가 관광 자원이 될 수도 있구나 느꼈다.
두 번째는 그림은 물론 서 있던 위치도 아름다웠던 쉼터 표지판이다. 나무 아래에 테이블이 하나 놓인 그림인데, 휴식을 표현하는 가장 완벽한 조합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테이블에 앉아 피크닉을 하며 잠시 쉬어가는 것, 참 뉴질랜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비슷하게 파란색 바탕에 카메라나 망원경 아이콘이 그려진 전망대(Scenic Lookout) 표지판 역시 자주 만나게 되는데, 경치를 보며 쉬어가라는 뜻이다. 한국의 휴게소처럼 깨끗한 화장실이 구비된 완벽한 건물에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쾌적함은 없지만, 상업적인 목적 없이 안내 표지판이 존재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새로웠다. 이런 쉼터 사인을 찾아가면 주차할 수 있는 자리만 있을 뿐 가게나 편의시설은 전혀 없고 말 그대로 탁 트인 자연경관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귀찮은 마음을 억누르고 가 보면 정말 “와-” 하고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내비게이션만 보며 목적지를 찾아가다 놓치기 쉬운 아름다운 풍경들을 그냥 지나가지 말라고, 같이 보며 감탄하자고 하는 것 같아 고마웠다. 뉴질랜드가 얼마나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지 도로 표지판만 봐도 느껴진다. 쉼터 표지판 근처에는 앞으로 구불구불한 길이 펼쳐질 테니 속도를 줄이라는 뜻의 굽은 도로(커브) 경고 표지판이 자주 보이는데, 이는 뉴질랜드가 자연 지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최소한의 공사를 하며 도로를 놓는 설계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멀미가 날 정도로 길이 꼬불꼬불하고 옆으로 가파른 절벽이 보여서 아슬아슬하기도 하지만, 캄캄한 터널 대신 눈부신 경치를 볼 수 있어 좋다. 직선보다 곡선을 추구하는 삶 같달까. 빨리 가는 것보다 좀 더 쉬엄쉬엄 둘러보며, 길을 떠난 이유가 도착이라기보다 여정이라는 느낌. 우리 인생에서도 과연 직선의 목표를 세우는 삶이 재밌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둘러 둘러 많은 변곡점을 만드는 게 ‘살고 싶다,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까 하고. 표지판을 보며 지난날을 곱씹어 보기도 했다.
세 번째는 뉴질랜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마오리어, 영어 언어 병기 표지판이다. 새로운 도시에 들어갈 때마다 마오리어와 영어가 나란히 적힌 환영 인사 표지판을 볼 수 있다. 마오리어로는 ‘하에레 마이(Haere mai)’ 혹은 ‘키아 오라(Kia ora)’라고 적혀있는데, ‘환영합니다’라는 뜻이다. 특히 ‘키아 오라’라는 인사는 한국어 ‘안녕’과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안녕’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할 안(安) 자에, 안정되고 편안할 녕(寧) 자를 써서 “안녕하세요.”라고 “당신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라는 축복의 마음을 담고 있듯이, ‘키아 오라’ 역시 ‘돼라(be)’라는 뜻의 키아(kia)와 ‘건강하다(healthy), 충만하다(well)’라는 뜻의 오라(ora)를 써서 “당신이 건강하기를, 당신의 삶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한 인사를 넘어 말속에 상대방을 향한 존중과 환대의 정서가 담겨 있어서 언어가 다르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가 평안하고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비슷하구나 싶어 반가웠다. 이렇게 뉴질랜드의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마오리어, 영어 병기 표지판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오리어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사용하는 언어로, 20세기 중반까지 식민지 동화 정책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거의 사라질 뻔했지만, 마오리어가 국가가 보호해야 할 문화적인 유물(타오아, Taonga)이라는 운동과 투쟁의 결과로 1987년 영어와 함께 공식 공용어가 되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오래지 않은 2021년부터 마오리어, 영어 병기 표지판 설치 계획(Bilingual Traffic Signs Programme)이 세워졌고, 아직도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가장 먼저 시행된 표지판은 학교 사인으로 마오리어 ‘쿠라(KURA)’가 위쪽에 위치하고 그 아래에 영어 ‘스쿨(SCHOOL)’을 적고 있어 마오리어와 그 문화에 대한 존중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 도로에서 지역 이름과 환영 인사를 표기할 때, 정부 기관 및 공공건물에서 기관명을 적을 때, 관광지에서 장소 명칭을 적을 때 마오리어와 영어가 병기된 표지판을 볼 수 있다. 표지판이 복잡해져서 운전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고, 표지판을 교체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며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표지판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도 있구나 하고 처음 깨닫게 해 주었다. 뉴질랜드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지 알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마오리어 병기 표지판은 문화적인 토양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표지판들을 통해 뉴질랜드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단순히 어디로 가는지를 안내하는 기능을 넘어 어떤 나라가 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 같기도 했다.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여유가 있는 삶이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을 위해 잠시 멈추는 것도 삶의 중요한 몫이며 동물들과 길을 공유하며 양보할 수 있는 자리를 둘 것. 또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숨을 고르고 주변의 경관을 느낄 수 있는 여지를 둘 것. 마지막으로 효율만 추구하기보다는 의미와 가치를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할 것. 표지판을 통해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돌아본 기분이 든다. 의무와 규칙, 규제의 진짜 목적은 그것을 지키기 위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