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로 매거진 만들고 마켓 참여하기
‘차곡차곡 벽돌을 쌓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브릭(Brick) 매거진을 발간했다. 동시에 뉴질랜드의 소도시 헌틀리의 이야기를 담은 마을 잡지이기도 하다. 2018년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6년 동안 헌틀리에 살았는데, 적응을 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오후 3시면 문을 닫는 카페, 마트 하나가 전부인 시내라니… 영화관, 미술관과 같은 문화 시설이 없는 도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적어도 내가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헌틀리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한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고 헌틀리에 대한 나의 시선을 담은 마을 잡지, 브릭(Brick, 벽돌)을 만들게 됐다. 실제로 헌틀리는 벽돌이 유명하고, 주재료가 되는 점토 매장지가 있어서 1884년부터 벽돌 생산을 시작해 지금까지 벽돌공장이 운영되고 있다. 무엇보다 단단하고 오래가며 지역의 색을 간직하고 있는 ‘벽돌’이 주는 의미가 좋았다. 우리의 하루도 작아 보이지만, 그 하루하루가 쌓여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습관, 분위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지 않을까. 벽돌 한 장처럼 매거진이 하나하나 쌓여갈 때 그만큼 헌틀리에 대해 알아가고, 마을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커뮤니티를 이루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육아를 하며 ‘하루’도 아닌 지금 ‘한 시간’을 살기에도 벅차하는 나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했다.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피곤한 몸으로 잠을 청하는 그 보통의 하루만으로도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용기가 있고, 외로울 때에만 완성되는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어두운 터널 안에서 구워진 고백 같은 것이다. ‘여기가 맞나, 뭘 하고 살아야 하지, 돌아갈까, 내가 왜 살아가야 하지’ 하고 ‘나’에게 집중했던 시절에서, 내게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게 되고 ‘이 하루를 잘 살아내고 싶다’ 하고 결심하게 된 이야기.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고, 운전을 하고, 청소를 하고,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는 동네 할머니들이 인생의 마스터임을 깨달은 이 변화가 브릭 매거진의 첫 시작이었다. 매거진에는 헌틀리에서 소 농장을 운영하는 파머 로저의 인터뷰에서부터 91세 베티 할머니의 하루 루틴에 대한 에세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휴식처이자 놀이터가 되는 정원을 가꾸는 시몬의 이야기, 아기가 태어나던 병원에서 추억이 피어나는 숙소로 탈바꿈한 100년 된 역사적인 건물 매노뷰즈(Manor Views)에 대한 소개 등을 담았다.
사실 5년 전부터 구상했던 아이디어였는데, 독립출판마켓인 타우랑가 진페스트(Tauranga Zinefest)가 10월 말에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야 실행에 나섰다. 한국에서는 2012년 7월에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은 월간지 그린마인드(green mind)를 두 친구와 함께 창간했었고, 약 2년 동안 발행했었다. 당시 홍대를 중심으로 인디서점들이 생겨났고 어바웃 북스, 언리미티드 에디션 등의 독립출판 마켓이 열리면서 대형 출판사에서 다루지 않는 실험적인 주제나 상업적이지 않은 시도들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뉴질랜드에서도 창작자가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장(場)인 독립출판 마켓이 열린다니 반가운 마음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모일지,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을지, 어떤 종류의 창작물들이 있을지 궁금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타우랑가 진페스트는 타우랑가 아트 페스티벌 기간 가운데 열려서 우연히 여행을 왔다가 들른 관광객들에서부터 1년 전부터 기다렸다는 마니아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뉴질랜드의 대중적인 행사를 갈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것은 장소의 접근성인데 계단이 없거나 경사로가 있어서 장애인, 노인과 같은 교통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 진페스트에서도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 유모차를 끌고 구경을 온 가족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앳된 창작자들도 눈에 띄었는데, A부터 Z까지 그에 맞는 동물을 그려서 알파벳 진을 만든 아이, 브로콜리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브로콜리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만화를 그린 아이,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스티커를 만든 청소년 등 존재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마켓의 제일 앞에는 무대가 있었는데, DJ가 계속 음악을 틀어주며 긴장을 풀어줬다. 창작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을 타거나 일어서서 춤을 추기도 무대 앞으로 나와 다 같이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한편에는 테이블이 놓여있었는데, 그 위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진들이 모여있었다. 지난해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출판물까지 함께 있어서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뉴질랜드가 섬나라여서 인지 바다를 주제로 하는 창작물들이 많이 보였는데, <Tidemarks>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갔었던 해변의 이름과 그곳에서 그린 파도 물결 그림, 그 장소에서 적은 시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멋있었다. <ISLANDS>라는 책에서도 자신이 방문한 뉴질랜드 섬들의 이름과 사진, 그곳에서 했던 섬에 대한 사유를 산문시로 적고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스는 뉴질랜드 해밀턴에서 활동한 만화가, 딘 밸린저(Dean Ballinger)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곳이었는데 작가가 아닌 그의 친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다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가를 대신해 그의 만화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며 친구들이 마켓에 참여해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작가의 <OHU>라는 만화는 캐릭터들이 와이카토 지역을 여행하는 초현실적인 이야기인데, 여기에 헌틀리 브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며 내게 책을 들고 와 페이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만화책에서 언급할 정도로 헌틀리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브릭(벽돌)이 맞는구나 싶어 반가웠고, 또 만화책 곳곳을 꿰뚫고 있는 친구들의 애정이 느껴져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마켓에서는 창작물에 대한 애정과 응원을 느낄 수 있었다. 매거진을 구입하며 다음 매거진은 언제 나오냐고 물어보는 사람, 그 자리에서 인스타그램 계정을 묻고 팔로우하는 사람,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놀라는 표정, 미소 짓는 표정, 경청하는 표정만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얻었다. 기획부터 인터뷰, 사진, 글쓰기, 디자인, 프린트까지 전 작업을 셀프로 진행하는 건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막상 인쇄되고 보니 폰트 크기를 더 크게 할걸, 좀 더 두꺼운 종이에 인쇄할걸, 한국어도 같이 수록할걸 등등 보완할 점들이 많이 보이지만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들이 떠올라서 좋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벌써부터 브릭 매거진의 표지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벽처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내가 작업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아이를 재우고 나서, 집안일을 하고 나서 겨우 남는 자투리 시간에 불과하지만 이 조각들이 쌓이면 어떻게 될까 기대가 된다. 너무 조금이라고 묻어두기보다는 부족하다고 덮어두기보다는 용기 있게 꺼내보이고 상처받고 계속 시도해 보는 편을 택하고 싶다. 이러한 과정 또한 누군가에게는 시작하는 용기를 주는 디딤돌이 될 수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뉴질랜드에서 이색 독립출판물들을 만날 수 있는 마켓들을 소개한다.
1) 타우랑가 진페스트 (Tauranga zine fest)
독립출판물 진(Zine)을 판매하는 마켓. 타우랑가 아트 페스티벌 기간 가운데 열리며 워크숍, 사진촬영과 같은 이벤트가 함께 있는 참여형 문화행사다. 2016년 처음 시작해 매년 10월마다 열리고 있다.
https://www.taurangafestival.co.nz/events/p/zinefest
2) 포토북 NZ (Photobook/NZ)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 있는 박물관(Museum of New Zealand Te Papa Tongarewa)에서 격년으로 열리는 포토북, 아트북 중심의 독립출판 페스티벌. 다음 행사는 2026년 8월로 예정되어 있다.
3) 스몰 프레스 페스트 (Small Press Fest)
뉴질랜드의 남섬에 있는 도시 더니든 오타고(Ōtepoti/Dunedin) 지역에서 열리는 ‘스몰 프레스’ 중심의 행사. 독립출판 창작자, 작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모여 워크숍, 토크, 마켓 등을 운영한다.
https://www.thearts.co.nz/boosted/projects/small-press-fest?utm_source=chatgpt.com
4) 인디 작가 페스티벌 (Indie Writers Festival)
오클랜드(West Auckland, Te Manawa)에서 열리는 행사로, 독립출판사, 작가 중심의 북페어(Book Fair)다. 마켓은 물론 저자와의 만남, 낭독회 등의 이벤트가 함께 열린다.
https://www.ketebooks.co.nz/en/events/indie-writers-festival-and-book-fair-te-manawa-west-auck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