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회. 파이브 가이즈
햄버거를 좋아한다.
이전 직장 후배들과 정기적으로 햄버거를 먹는 모임을 갖는다고 지난 글에서 이야기 했다. 오랜만에 강남에서 모였다. 기록을 잘 남기는 K의 확인에 따르면 이번 모임은 53회차. 거의 10년은 된 것 같은데, 새로운 햄버거 가게가 꾸준히 등장해 주어서 모임이 끝날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명색이 햄버거를 즐기는 모임인데, 최근 한국에 입점한 ’파이브 가이즈‘를 안 가볼 수 없지. 퇴근 후 강남으로 향했다. 설마 아직도 대기를 할까 싶었는데, 저녁 6시 반쯤 도착한 파이브 가이즈에는 대기줄이 있었다. 그래도 금방금방 줄어들어서 20분 정도 기다렸다가 입장.
햄버거 종류가 많다. 게다가 소스도 다양하고. 난 이런 선택에 취약하다. 분명히 런던 파이브 가이즈에서 먹었었는데, 그 때 뭘 어떻게 주문했는지 기억이 안난다. K에게 물었다. ‘뭐가 맛있지?’ K는 답했다. ‘그냥 제일 비싼거 먹으면 됩니다’ 맞네. 역시 현명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육즙. 패티가 잘 구워져서 먹기에 고소했다. 치즈와 베이컨까지 함께하니, 혈관에게 미안했지만 맛있는 건 맛있는거다.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사악한 가격답게 양도 많아서 부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쿠킹호일에 포장되어 나오는데, 나는 볼 때마다 쿠킹호일의 앞뒤가 헷갈린다. 반짝거리는 쪽과 안반짝거리는 쪽이 있는데, 어느 쪽이 음식에 닿아야 되는걸까. (알아보니 양면 다 효과는 같다고 한다. 쓸데 없는 고민하지 말고 맛있게 먹으면 될 듯)
그 유명한 땅콩은 자유롭게 가져다 먹으면 되는데, 아마 한국의 진상들을 고려했는지 매장 입구에만 비치해 두었더라. 좋은 아이디어다. 땅콩을 2층에도 놓았다면 K-진상의 매콤한 맛에 많이 놀랐을 수도 있겠다.(봉지에 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땅콩에 소금을 뿌려놓은 건지, 굉장히 짰다. 땅콩 안에까지 소금이 들어간건 어떤 원리일까. 절여놓은건가. 짭짤하니까 계속 손이 갔다. 맥주도 생각나고. 여기는 땅콩맛집이었구나. 왜 사람들이 파이브 가이즈 땅콩 얘기를 많이 하는지 알겠다.
조금 늦게 합류한 Y, K와 함께 얼마 전 다녀온 미국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행한 글을 잘 읽었다고 해주어서 고마웠다. 별거 아닌 글인데, 잘 읽고 있다는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 힘난다.
현재 각자 회사에서의 근황도 이야기 했다. 아무래도 연차가 쌓이고 금융권에 있는 친구들이다보니 회사 내에서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고민들이 많아보였다. K는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데, IT아웃소싱을 줄이고 인하우스 개발로 대체하려는 계획이라고 한다. 전산을 외주개발에 맡기는 분위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만큼 개발자 역량이 중요해지고 있다. 좋은 개발자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고연차에게는 필요하다.
글을 쓰다보니, 얼마전 만난 전 회사 PM, I가 해준 조언이 생각난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그 도메인이 뭐라고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냐. 니가 아무리 그런다고 아무도 안 알아준다. 적당히 내려놓고 편하게 생각해라. 그저 한낱 IT서비스일 뿐이다.’
그래, '좋은 친구들 만나서 맛난 햄버거 먹고 행복했다'고 쓰는 글에, ‘훌륭한 개발자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쓰는 건 ‘아등바등’이다. 신념이나 신뢰, 양심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어느새 싸구려 취급받게 된 이 시대에, 도메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라니, 우울하다 못해 촌스럽다. 꽉 쥔 주먹에 적당히 힘을 빼보자.
Y는 일제 불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여전히 잘 지켜가고 있다. 일본 관련 제품은 소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K는 올해만 일본 여행을 4회 다녀왔고, 올해가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다녀올 계획이라고 한다. 둘 중에 옳고 그름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개인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시큰둥한 태도의 기본이다. 좋고 행복한 것을 하다가 가는 것이 인생에는 더 좋다. 후회없이 살아야 한다. 단, 남에게 강요는 금물이다. 나도 요새 ‘남에게 가르치려 드는 태도’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고 고치려고 노력중인데, ‘시큰둥’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햄버거를 얼른 먹고 일어났다.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게 어쩐지 불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술은 잘 마시지 않는다. 늘 그렇듯 커피를 한 잔 하러 가야겠다. Y가 말했다. '커피빈 가죠? 커피빈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형 때문에 헤이즐넛 라떼 먹기 시작했잖아요 ㅎㅎ' 그랬다. 맞다. 나는 시청 앞에서 근무하던 시절부터 커피빈 헤이즐넛 라떼를 좋아했다. 내 이 오래된 취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이가 드니,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면 고맙고 편하다. 시나브로 꼰대가 되어간다.
여기서 기억나는 대화는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가’ 였는데, 다양하고 재미있는 의견들을 들을 수 있었다. 각자 원하는 노년의 기대 생활 수준이 달랐다. 행복의 기준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누구는 그냥 잠 잘 수 있는 방에, 적당히 끼니를 떼우면 된다고 하고, 또 누구는 그래도 지금 생활 수준을 유지한 채 노후를 맞이하고 싶다고 했다. 노후에 필요한 금액에 대한 의견은 월 500부터 다양했다. 직장연금, 개인연금부터 주택연금까지 여러가지 방식의 은퇴자금마련에 대한 노하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종신보험에 대한 정보가 인상깊었다.
종신보험은 계약자의 사망시 보험금이 지급되는 형태의 상품이다. 그래서 따로 체결 기간도 없다. 보험회사는 인간의 기대여명, 생존율, 사망률 등에 관심이 많다. 왜냐면 그 정보 자체가 장수리스크로서 보험회사의 기대이익에 직격을 날리는 팩터이기 때문이다. 정보통 K에 의하면 80세 이상 남여 생존 비율이 2:8 정도로 여성이 극도로 우세한데, 그 격차는 의학이 발달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남성 호르몬 때문인가? 호르몬을 조절하면 개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라고 탄식했지만, Y는 조용히 말했다. 'Y염색체 때문일꺼에요' 그는 이럴 때 촌철살인이다. 그렇지. 남성 호르몬도 결국은 Y염색체 때문이다. 호르몬을 줄여봤자 Y염색체는 어쩌지 못하지. 2:8이라는 생존율만 보면, X염색체 두개가 훨씬 효율적인 것 같다. 여자가 유전적으로 더 우세한 걸까. 새삼 궁금해졌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아, 우리가 다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대화 주제가 종신보험이라니.
다음 모임은 등산으로 정했는데, 변명을 좀 하자면, ‘내가 강요한 거 아니다.‘ 모두 다 함께 의견을 모았다. 라고 말하면서도 찝찝한 이 기분은 뭘까. (싫으면 꼭 말해주길) 아무튼. 맨날 가자가자 말만 하고 실행해 옮기지 못했는데, 이번에 날을 잡았다.
아내는 내가 이 모임을 다녀올 때마다 ‘술도 한 잔 사주고 그러지 또 햄버거만 먹고 왔어?’ 라고 핀잔을 준다. 그렇게 꼰대처럼 굴다간 후배들이 손절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도 한다. 내가 ‘다음 번엔 등산을 가기로 했다’고 이야기하면 나를 꼰대 끝판왕 쯤으로 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햄버거를 53회나 먹었으니, 이젠 운동을 좀 할 때다. 운동엔 등산이 제격이지. 햄버거를 포장해서 산 정상에서 먹어볼까나.
53회 모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