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하늘에 노을이 번지며 세상이 천천히 고요를 입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저녁 무렵.
나는 봉은사로 걸어가고 있었다.
포스코 앞을 지나 쭉 가는데 묘한 순댓국 집이 눈에 띄었다.
맛집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보니 느껴지는 비슷한 바이브.
지나칠 수가 없는 분위기 같은 게 있다.
어쩐지 들어가서 한 그릇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상호가 재미있다. '박서방 순대국밥'
사위 박서방에게 주는 장모님의 마음인 건가.
실내는 제법 넓다.
역시 사람들이 많은 게, 맛집의 기운이 풍긴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운이 좋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가게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호기심.
밑반찬이 바로 나왔다.
잘되는 가게의 특징은, 서빙 프로세스 자체가 매뉴얼화 되어있어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그만큼 일하시는 종업원 분들의 마인드가 훌륭하다고 이해해도 될까.(직장 생활을 오래 해 본 분들은 느낄 수 있을 테다.)
순댓국집의 밑반찬은 비슷한 가이드 라인이라도 있는지. 밑반찬 종류가 대동소이하다.
나왔다.
순대국밥.
바글바글 끓여 내오진 않는다.
국물이 맑다.
다대기를 풀지 않고 일단 한 숟가락 먹어보자.
이대로 괜찮으면 하얀 국물에 먹어도 좋겠다.
근데 조금 싱겁다.
싱거워서 얹혀 나온 다대기를 잘 풀었다.
다대기를 넣어 준 이유가 있을 거다.
순대는 당면순대.
그런데 안에 든 당면이 굵다.
시판되는 당면순대랑 좀 다르다.
밥은 토렴 되어 있다.
잘 보면 내장이 종류별로 많이 들어있다.
고기 쪽이 많이 들어있는 순댓국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내장이 많이 들어있는 곳이 있다.
나는 양 쪽 다 좋다.
각자의 매력이 있다.
뭔가 반갑고 맛있다 싶더라니, 여기 국물이 화목 순댓국 여의도점에 가깝다.
약수 순댓국 같기도 하고.
아무튼 맑고 가벼운 국물 쪽이다.
들깨향, 국물의 점도 모두 화목의 그것과 비슷하다.
내용물이 풍부하다.
다대기를 푼 쪽이 더 맛있다.
내장에 새우젓을 올려서 먹으면 감칠맛이 두 배.
확실히 토렴식만의 매력이 있다.
국물이 밥알갱이 하나하나에 잘 배어 풍부한 맛을 내준다.
그냥 '밥을 말아먹는 것'과는 다른 식감이다.
이상하다.
흰 밥이 따로 나올 때 밥을 말면, 국물에 밥알의 전분기가 녹아 걸쭉해지는데.
여기는 계속해서 가벼운 국물이 유지된다.
이러면 계속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다 먹었다.
인터넷에서 맛집이라고 포스팅된 곳을 찾아 방문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맛집은 더욱 반갑다. 물론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그런 촉이 좀 없나 보다. 그래도 10번 도전하면 한두 번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찾아낸다. 그럴 때 제법 신난다. 호기심이 사라진 중년 아저씨의 작은 재미라고나 할까.
예전에 전 회사 후배들을 만나서 같이 술을 한잔 하고, 오랜만에 스타 크래프트를 해보자고 해서 같이 PC방에 간 적이 있다. 내가 당구도 못 치고, 술도 잘 못 마시고, 롤도 못하고,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다고 하니 노인공경으로 데려가준 거다. 그 친구들은 심지어 스타 크래프트 세대도 아니었다.
게임을 몇 판 했는데, 내가 너무 게임을 못했나 보다.
한 후배가 옆자리에서 나한테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ㅇㅇ은 대체 학교 다닐 때 뭐 하고 놀았어요?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다들 빵 터져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학교 다니면서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특별한 취미랄 게 없다.
(글로 써놓고 보니 너무 매력 없는 사람이네 ㅋㅋㅋ)
아무튼, 스타 크래프트도 못하고 잡기에 능하지도 않은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지만.
오늘처럼,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는 맛집의 소소한 행복이 또 하루를 살게 해주는 힘이 된다.
인생이 뭐 대단한 걸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 거다.
결국 뒤를 돌아봤을 때 남는 건, 작은 행복 아니겠는가.
지금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계속해서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