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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 Apr 03. 2023

일 년에 한 번은 떠나기로 약속해서

리스본행 야간 비행기를 끊었다

...? 최저가가 200만 원이라고?

스카이스캐너에 anywhere를 검색했다. 낮은 가격 순 필터를 걸어놔서, 당연히 로딩 중인 줄 알았다. 그런데 검색이 끝난 거였다. 내가 본 게 최저가란다. 파리, 마드리드, 런던, 로마, 프랑크푸르트. 항공편이 제일 많은 서유럽 도시 경유편도 기본 130만 원. 조금만 비껴가도 200만 원이다.


가끔 떠나는 여행은 보고 경험할 게 많은 서구권 위주로 다녔는데. 이래서 다들 동남아와 일본으로 향하나 보다. 나도 이제 어디 휴양지나 온천이나 가서 몸 푹 담그고 싶다. 아니 근데 쉴거면 피곤하게 비행기 탈 거 있나? 이제 날도 풀렸는데. 한국에도 그 돈이면 갈 곳이 얼마나 많게요? 아줌마 다 됐다.


엄마 같은 어른은 되기 싫었는데

어딜 가도 "돈돈"하는 엄마가 싫었다. 그냥 기분 낼 때는 좀 내고, 분위기 좀 맞추면 안 되나 싶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도 가격 대비 어쩌고저쩌고. 어차피 엄마가 내는 것도 아닌데.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맨날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닌데. 그 한 번을 즐기지를 못하고.


그런데, 어느새 엄마를 똑 닮은 내가 있다. 머릿속에 계산기가 떡하니 틀어 쥐고 앉아서. '이 돈이면 한 달 생활비인데, 한 달 대출이자가 얼만데.' 하면서 집 반경 500m를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초 당 하나씩 만들어내는 내가 여기 있다. 물론 엄마처럼 말은 안 하지만


살았는데요 죽었습니다

난 아직 자식도 없고, 반려 동물도 없고. 물론 늙어가는 부모님은 계시지만 아직은 내 몸 하나 건사하면 그뿐인데도. 이렇게 현생이 무겁고 두렵다. 언제까지 회사에 다닐 수 있을지, 언제까지 돈을 벌 수 있을지. 그리고 과연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내 자리가 너무나 쉽게 사라질 것 같아서.


지금 겨우 버는 돈을 바득바득 한 톨도 낭비하지 않고 모아야 겨우 안전한 죽음에 닿게 되는 것이 아닌지. 겨우 서울역 신세를 면하고 본전을 맞출 수 있는 건 아닌지. 해외여행은 무슨, 그냥 집에서 덩그러니 돈 안 드는 TV나 보고 유튜브나 보며 가만히 숨만 쉬고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머뭇거리게 된다. 이게 무슨 MZ야. X세대도 이렇게는 안 살겠어요. 아니 우리 엄마도 이 정도는 아니야.


하루이틀도 아니고, 약속했잖아

이젠 에너지도 남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명쾌함도 지금의 내겐 없다. 그저 한없이 지지부진함 뿐. 처음 스카이스캐너 들어간 게 벌써 몇 달 전인데 아직도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다니. 하긴 뭐 점심 메뉴도 아직 못 정하는 데.


과거의 나는 이런 구질구질한 나를 알아서, 나이 든 나는 더 심해질 게 빤히 보여서. 일 년에 한 번은 떠나자고 나 자신과 약속한 걸까? 맨날 도시락 까먹고, 버스비 아끼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움, 휴식을 통한 존엄성 회복 뭐 그런 거. 당장의 생존 말고 다른 거 가끔씩 기억하라고. 안 그럼 진짜 죽음이 코앞이라고.


알았어. 간다 가면 되잖아

어디선가 송장에 가까운 나를 보고 슬퍼할지도 모를 과거의 나를 위해 오늘, 드디어 리스본행 야간 항공을 끊었다. 물론 최저가 열심히 찾아서 200만 원에서 130만 원까지 낮췄지만. 가서도 열심히 계산기 두들기겠지만. 아마 가기 전부터도 7만 원 아끼겠다고 좌석 선택 미리 안 하고 허리가 끊어지겠지만. 그래도 아무튼 "일 년에 한 번은 떠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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